우리는 대체로 두 가지 의미의 유산을 쓰는 것 같다. 누군가가 물려준 재산, 사물 또는 문화를 뜻하는 유산(遺産)과 태아가 달이 차기 전에 죽어서 나옴을 뜻하는 유산(流産) 남길 遺와 흐를 流의 차이. 나는 오늘 두 가지 유산에 대해 기록해보려고 한다.
지난해 6월, 뱃속의 아이를 잃었다. 태어났으면 우리 집 둘째가 될 아이였다. 지금은 그 슬픔에서 많이 무뎌졌지만, 그 당시에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계획했던 아이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내 뱃속에 있다는 걸 실감했기 때문이었나. 가벼운 입덧은 아이를 환영하는 마음에 나에겐 오히려 기쁨이었다. 봄이 때와 마찬가지로 임신 테스트기를 하루에 1번 이상 사용하며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둘째를 갖겠다고 한 결심이 쉽지 않았기에 이제 막 들어선 아기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었다. 그랬는데 잃었다.
학교에서 수업하는데 무언가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주말 동안 조금씩 보였던 혈흔 때문에 온몸이 예민한 상태였다. 지난 산부인과 검진일에는 아이의 심장 박동 수가 느리다는, 부정적인 이야기를 의사에게 듣고 왔다. 거기다 주말에 피까지 본상태였다. 최악의 상황을 마음속으로 준비하곤 있었고, 월요일에 조퇴하고 병원 가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1, 2교시 수업을 하는데 무언가 흐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수업 시간에 웬만해선 앉지 않는데 아이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앉아서 수업했다. 쉬는 시간 평소대로 내 자리에 와서 종알대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은 온통 내 뱃속에 있는 아이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2교시가 끝나갈 때쯤 상태가 더 심각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3교시 이동 수업을 준비하는 아이들에게 잠시 화장실 다녀오겠다 전하고 급하게 화장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속옷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는 걸 보니 손발이 덜덜 떨렸다. '병원 가야 한다' 생각했다. 교실 이동 준비를 마친 아이들을 이끌고 강당으로 갔다가 바로 교무실로 향했다. 내 얼굴에 묻어 있는 공포감을 알아보신 건지 교감 선생님께서 무슨 일이냐고 걱정스레 여쭤보셨다. 병원에 가야겠다고, 피가 흐른다고 얘기를 했던 것 같다. 일부러 작게 얘기하려던 건 아닌데 목소리가 크게 나오질 않았다. 얼른 조퇴 쓰고 병원 가라는 말씀에 교실로 뛰어들 듯 들어가 복무 상신을 급하게 하고 학교를 나섰다. 택시를 탈지 직접 차를 몰고 갈지 잠시 고민하다 운전해서 가기로 결정했다. 가는 내내 손발이 떨려 운전하기로 한 결정에 후회했다. 이러다간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큰일 날 것 같았다.
간신히 병원에 도착해 접수를 했다. 지난 금요일에 진료 봤는데 오늘 무슨 일로 왔냐는 간호사 질문에 피가 보인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는 그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지던지. 이게 지금 꿈인지 현실인지. 내가 왜 이 시간에 여기에 앉아 있는가. 무서운 생각과 의문만 번갈아가며 머릿속에 떠올랐다. 영겁의 시간 같던 시간(20~30분 정도였던 거 같다)이 지나고 진료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의사 선생님께 피가 비쳐 왔다고 말씀드리니 바로 초음파를 해보자고 하셨다.
초음파 화면을 보는데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간신히 눈에 잡힌 아이는 움직임이 없었다. 의사 선생님은 심장 박동이 멈추었고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다 하셨다.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시기 전까지 큰 소리로 쿵쿵 울려대던 심장 소리가 조용해졌다. 눈물이 왈칵 나올 것 같은데 병원 안에선 울고 싶지 않았다. 화면에 잡힌 아이는 6주 정도의 태아 모습이었다. 그 아이의 심장 소리를 바로 며칠 전에 들었는데. 움직임 없이 둥둥 떠 있는 것 같은 아이의 모습이 애처롭게 보였다.
엄마 잘못이 아니라 아기가 약해서 그런 거라고. 어떻게 잘 유지되어 태어났어도 문제가 있었을 거라고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지만 별 위로도, 인정도 되지 않았다. 정신없이 병원비를 내고 주차장의 내 차 안에 들어가자마자 눈물을 쏟아냈다. 엉엉 소리를 내며 운 게 얼마만이던가. 혼자 막 울다 울음소리가 조금 잦아들자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 아기가 죽었어." 딱 한 마디하고 또 엉엉 울었다. 남편이 뭐라 뭐라 이야기를 했지만 지금도 무슨 얘길 한 건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죽은 아이가 내 뱃속에 있다는 게 너무 슬프고 무서웠다.
다음 날, 정해진 시간에 병원으로 가 소파 수술을 했다. 수술을 하는 장소는 매우 협소한 곳이었다. 그곳은 봄이를 자연분만으로 낳고 후처치를 하기 위해 갔던 곳이기도 했다. 그때와는 다른 상황에, 이렇게 끔찍한 기분으로 다시 오다니. 더 마음이 아팠다. 마취를 하고 언제 잠드나 생각하기 무섭게 까무룩 잠들었나 보다. 간호사님이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다. 머리가 어지러운 것 빼고는 아무 느낌이 없었다. 잠시 안정실에 누워 있었다. '이제 내 뱃속에 아이가 없는 건가?' 너무나도 명백한 답이 있었지만 실감이 나질 않았다. 혼자 누워있었지만 소리 내어 울지 않으려 했다. 참고 참아서 흐느꼈다. 바깥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편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내 유산 소식에 4시간 거리의 진주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엄마는 우리 집에 앉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 당시에는 내 슬픔을 이기기가 어려워 주변의 다른 사람들 기분은 생각지도 못했다. 나는 누군가의 위로도, 걱정 어린 시선도 받고 싶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혼자가 아니라 다행이었다 싶은데 그때는 혼자 있고 싶었다.
일주일 병가를 쓰고 출근하기로 했다. 더 길게 쉬고 싶었는데 학교 상황이 좋지 않았다. 코로나19 사태가 시작되고부턴 자리 비우기가 편치 않았다. 나만 생각하라고, 맘 속으로 외쳐보기도 했지만 결국 일주일 쉬고 출근하는 걸로 결정되었다. 일주일을 내리 누워 있었다. 뭔갈 할 의지가 생기지 않았다. 조금만 방심하면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학교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렇게 마음이 안 좋은데 여러 사람을 만나 신경 쓸 수 있을까? 일주일 만에 학교로 돌아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수업을 하고, 다른 아이들을 지도해야 한다는 것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막상 학교로 돌아가서는 잘 지냈다. 아마 집에서 계속 쉬었다면 내 정신 건강에 더 좋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를 잃었다는 슬픔을 일하면서 잠시 잊을 수 있었다. 마침 바쁜 7월, 학기말을 보냈고 여름방학이 다가왔다. 학교에서 생각할 틈도 없이 바쁘게 지내고 집으로 돌아와선 집안일과 육아에 힘썼다. 결혼하고 이만큼 집안일에 최선을 다하긴 처음이었다. 종종 시간의 빈틈이 생기면 내가 유산했다는 생각에 잠기곤 했다. 수술 후 거짓말처럼 사라진 울렁거림과 배통증. 몸은 편해졌는데 마음이 불편했다. 다른 데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아 그간 해오던 여러 모임을 중단했다. 솔직하게 이유를 밝히고는 건강해져서 돌아오겠다고 말을 남기니 많은 분이 위로와 응원을 해주셨다.
유산 후 남은 임신 지원금을 소진하고자 한의원에서 보약을 지어다 먹었다. 이른 주수의 유산이 엄마의 잘못이 아니라곤 하지만 그간 건강을 제대로 챙기지 않았다는 게 마음에 계속 걸렸다. 욕심나는 일이라면 무리해서 진행했고, 제안이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힘들어도 일을 지속하곤 했었다. 피곤해서 쉬고 싶어도 마음 편히 쉬질 못했다. 분명 이런 상황은 쌓이고 쌓여서 내 몸을 나약하게 만들었을 터. 그간 내가 몸 건강을 등한시해왔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제는 그 사실이 더 크고 무겁게 다가왔다. 이제는 무리하지 않겠다. 다짐했다.
내려놓은 것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기로 했다. 피곤하다 싶으면 아직 마음이 편하진 않지만 일을 그만두거나 중단하기도 했다. 이것저것 배우기도 많이 배웠고, 빈틈없이 살려고 애쓴 시간들이 있었으나 이제는 여러 가지를 해내려고 애쓰기보다는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기로 했다. 일, 육아, 집안일. 그리고 아주 중요한 나를 위해 하는 독서와 글쓰기. 모임도 많이 줄였고, 아무 생각 없이 쉬는 시간을 갖기 시작했다.
이것이 떠나간 아이가 남긴 유산(遺産)이 아닌가. 내 몸을 조금은 돌볼 수 있게 한 것. 무언가에 심하게 집착하거나 해야 하는 일에 아등바등하지 않기로 다짐하게 한 것. 빠른 성과를 보고자 하는 욕심을 버리기로 결심하게 한 것. 그간 내가 얼마나 자발적으로 발 동동거리며 살아왔는지 되돌아보게 한 것. 나를 성장시키기보다 오히려 괴롭게 만들었던 일들을 되짚어보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큰 유산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