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항이 주는 시원한 고통
보랏빛으로 물든 동그라미가 어깨를 수놓는다. 나란히 찍히거나, 몇몇 개가 겹쳐지며 만들어진 무늬는 움직임에 따라 그 모양이 흐트러지며 작은 통증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그 통증 속에 배어있는 작은 시원함은 중독성마저 지니고 있다. 통증 위로 통증을 더한다. 혼자 어깨에 동그란 부항을 하나씩 붙이며, 근육을 풀어 나간다. 아픔으로만 느껴지던 이 행위는 나이가 들어가며 색다른 감각으로 변해간다.
축 늘어진 팔의 무게조차 버티지 못해 어깨 통증을 호소하던 날이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하루의 대부분을 공부에 쏟아붓던 그때, 어깨 위로 내려앉는 통증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파스와 진통제를 이용해 보지만, 연필을 잡고 선 하나를 긋는 것도 괴로워질 때쯤, 어머니의 손에 부항이 쥐어져 있었다. 악- 부항을 하나씩 올려놓을 때마다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피부가 당겨지는 고통에 눈물마저 배어 나오던 그때, 얼얼한 어깨와 등 위로 어머니의 손바닥이 부드럽게 와닿는다. 검푸르게 멍이 든 어깨는 며칠간 움직일 때마다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고질적으로 괴롭히던 어깨의 통증은 사라졌다. 이후로도 간간이 어머니 손에 붙잡혀 부항을 뜨며, 고통을 고통으로 상쇄해 나갔다. 그 짧은 시간의 아픔이 통증을 사라지게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결코 좋아하지 않는 시간이었다.
이제는 나이가 든 모양이다. 고통뿐이던 시간 속에 다른 감각이 더해진다. 피부가 당겨지는 그 통증 속에서 아래에 굳어 있던 근육들이 펴지는 작은 쾌감이 느껴진다. 아픈데 시원해- 부항의 동그란 모양에 따라 검붉게 남는 멍의 흔적조차도 작은 쾌감이 된다. 움직일 때마다 멍든 자리가 아프다. 하지만 움직임의 제약이 사라지며 점차 근육의 경직이 풀려가는 그 감각이 좋아진다. 고통을 즐기게 되다니, 이게 어른이 된 증거일까. 한없이 커 보이기만 했던, 어린 시절 부모님의 등에도 동그란 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어릴 적, 부모님의 어깨나 허리에 부항을 붙이곤 했었다. 손가락으로 대충 짚어주는 자리에 부항을 올려두고, 펌프를 잡아당긴다. 거기보다 조금 더 아래, 아니 옆에- 부모님의 말에 따라 부항의 위치를 옮겨가며 멍자국을 만든다. 좀 더 붙여도 돼- 이거 오래 붙이면 물집 잡힌대잖아- 빨리 떼어내는 나와, 조금 더 붙이라는 부모님의 말이 서로 오고 가며 시퍼런 등이 완성된다. 자국에 따라 올록볼록 요철이 생겨난 등허리를 손바닥으로 살살 문지르며 서비스 시간이 끝이 난다.
"안 아파?"
"아프긴, 시원하기만 한데."
보랏빛 멍 위로 손바닥을 쓸어내릴 때면, 통증이 느껴질 것만 같지만 부모님의 표정은 평온하다. 조금 더 붙여달라는 말에, 안돼- 더 하면 물집 잡힐 거 같아- 타박을 건네며, 막연한 생각을 한다. 어른이 되면, 부항을 떠도 안 아픈 건가-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그때 부모님을 이해한다. 물론 아프다. 아프지만, 그 아픔 속에 느껴지는 시원함이 더 크다.
"너희들도 슬슬 아는 애들은 알겠지만, 뜨거운 물에 들어갔을 때 한국 사람들은 '시원하다'라고 하잖아."
아이들에게 말 문화에 대해 설명할 때쯤, 늘 예로 드는 말이다. 뜨거운 물에 푹 담갔을 때, 뜨거운 국물을 마실 때, 자동적으로 튀어나오는 말인 '시원하다'. 어른이 되고 그 의미를 이해하게 되지만, 뜨겁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이면에서 느껴지는 다른 감각이 '시원하다'라는 어휘로 찾아온다. 뜨거움이 몸을 쓸어내릴 때의 그 감각은 다른 어휘로는 표현되지 않는다.
뜨거움 속에 담긴 시원함은 역설적이다. 통증으로 통증을 가라앉힌다는 행위 역시도 역설적이다. 몸에서 보내는 경고의 신호인 통증 위로 다른 통증을 뒤덮는다는 행위는 또 얼마나 모순적인가. 하지만 삶을 살아가며 통증과 고통이 건네주는 또 다른 쾌락을 깨닫는다. 더 이상 팔을 들어 올리지 못할 정도로 운동을 한 뒤에,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를 정도로 달리기를 한 뒤에, 찢어질 듯한 그 통증 속에서 느껴지는 쾌락은 매혹적이기까지 하다. 이러한 모순적인 통증들이, 삶의 즐거움을 만들곤 한다. 어쩌면, 이 통증에서 느껴지는 쾌락이 힘겨운 세상살이를 조금 더 살만하게 만들어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깨로 내려앉는 묵직한 통증 위로 또 다른 통증을 얹는다. 아픈데 시원한, 그 기분 좋은 모순을 즐긴다. 하얀 파스 하나로 멍 자국을 가리면서, 나른하게 풀어진 근육을 천천히 늘여준다. 고통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그 고통을 즐기는 어른이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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