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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속 길을 선택할 때,

가끔은 실수해도, 맞을 때도 있으니까.

by 연하일휘 Mar 08. 2025

길 위로 이어진 선들을 따라가며 몇 번 말을 건네보다 포기하고 말았다. 내비게이션에게 말을 건네도 돌아오지 않을 답인 것은 알지만, 가끔 편한 길을 두고 이리저리 빙빙 돌게 하는 녀석인 탓이다. 분명 이쯤에서 좌회전을 했던 것 같은데, 나의 기억과 내비게이션 안내가 자꾸만 어긋난다. 그래도 길치인 주인보다는 목적지까지 잘 안내하겠지. 기억에 대한 믿음을 밀어 두고 안내해 주는 대로 따라간다. 내 고집대로 갔다면 아침부터 길을 빙빙 돌뻔했다. 내 불확실한 기억 속 길들은 내비게이션이 안내해 준 길을 따라간 뒤에서야 나타났다.


이른 아침부터 차를 타고 가야 할 거리에 있는 병원으로 향한다. 동네에 있는 병원들 중에서도 '잘한다'라는 이야기가 붙은 병원들이 있긴 하지만, 꽤 길게 이어지는 감기가 심상치 않은 탓이다. 단순한 코감기와 목감기인 줄 알았건만, 뺨에서 시작된 통증이 점점 올라가더니 눈 언저리와 두통으로 이어졌다. 부비동염 치료를 잘한다고 추천을 받은 병원이 꽤 거리가 있기에, 내비게이션 하나를 믿고 아침부터 이동을 한다.


문 앞에는 9시 진료 시작이란 글귀가 붙어 있지만, 이미 진료실을 들락거리는 환자들의 모습이 보인다. 증상들을 받아 적으시던 의사 선생님은 부비동염이 의심된다며 CT를 제안한다. 치과에서 찍던 X-레이와 비슷하다만, 이빨로 앙-물고 있는 부위가 없다는 것이 차이점일까. 처음으로 찍어본 CT에 신기해할 기력조차 없이, 대기실 의자에 다시 축 늘어진다. 막힌 코가 불편해 요 며칠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탓이다.



PixabayPixabay



CT사진을 마주하니, 설명을 듣기 전부터 감이 온다. 보는 법 하나 모르겠다마는, 아무리 봐도 양쪽 코 옆 부분이 확연하게 대조된다.


"지금 보면, 여기 눈 위쪽 공간이랑, 여기 오른쪽 공간에 농이 가득 차 있어요. 이런 거는 염증이고요. 원래라면 이것처럼 공기가 통하며 까맣게 보여야 하는데."


눈가가 욱신거림과 오른쪽으로만 오던 통증의 원인을 알고 나니 속이 좀 후련하다. 다만 최소 3주는 꽤 센 항생제를 먹으며, 코세척도 꾸준히 해 주어야 한다는 말. 그리고 "위약을 조밀하게 처방은 할 건데...." 흐려지는 말끝에서 한동안 겪을 위의 고생이 아른거린다.


처음부터 병원을 잘 찾았더라면 괜찮았을까. 아니, 아마도 처음에는 단순 감기가 맞았을 것이다. 감기와 함께 찾아온 비염이 건조함을 못 이겨 점차 심해지며 지금에 이르렀을 가능성이 높다. 처음 찾았던 이비인후과에서 약을 먹으며 호전이 되었었다. 다 낫지는 않았지만, 자연치유력을 믿으며 기다렸었는데. 그 과정에서 육아 도우미 역할을 하면서 제대로 쉬지 못하니, 천천히 증상이 심해졌을 터다. 도통 낫질 않아 일터와 가까운 내과에서 진료를 받으며 '비염'때문이라는 진단을 받았었다. 차라리 그때 이비인후과를 갔더라면. 혹은 조금 더 빨리 이비인후과 진료를 받았다면 이리 심해지지는 않았을 텐데.


결제창에 뜬 숫자들만큼 주머니가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며 무의미한 가정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여러 선택들이 결국 악화라는 결과로 이어진 탓이다. 짧은 여행을 다녀온 직후, 그저 건조함과 피곤함에 코감기가 심해졌다고 방치하지 말고, 병원을 다녀올걸. 비행기를 타고 내리며 느꼈던 통증들을 쉽게 넘기지 말 걸.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가리키는 내비게이션의 선을 바라보다 익숙한 건물로 방향을 틀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저 건물을 기준으로 좌회전 후 일직선으로 갔을 때 동네로 통하는 큰 길이 나올 텐데. 내비게이션은 연신 그 길이 틀렸다며 다른 길을 안내해 주다, 중반쯤 이르러서야 원했던 방향으로 이어진 선을 보여준다. 나의 기억 속 길이 맞았다.


오랜만에 선택이 맞았다는 기쁨은 잠시, 약기운에 몸이 느른해진다. 무의미한 후회는 그만두고, 빨리 낫자. 늘 잘못된 선택만 하는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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