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윤이상하우스에서 보내는 평화의 편지 - 정진헌 (2)
피스레터는 어린이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에서 정기적으로 발행하는 잡지입니다. 우리 사회가, 우리 역사가 놓치고 있는 평화적 가치를 발견하여 글로 쓰고, 함께 읽고 소통하는 실천을 통해 평화적 가치와 담론을 공유하고, 우리의 평화를 함께 만들어 가고자 합니다. <피스레터 다시 읽기>에서는 피스레터에 기고되었던 글을 다시 소개합니다. 피스레터는 어린이어깨동무 홈페이지(www.okfriend.org)나 평화교육센터 블로그(https://peacecenter.tistory.com)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시선 | 베를린 윤이상하우스에서 보내는 평화의 편지]
지금도 꿈만 같습니다. 백두산 천지에 올라 맞잡은 두 손을 번쩍 치켜든 남북한 두 정상의 모습! 한인 교포들의 사이에서는 물론, 때 마침 한가위 명절을 맞은 고국에서도 추석 인사를 넣어 두루두루 회람한 사진은 진한 감동이었습니다. 백두산 정상에 저도 두 번 오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을 통해 올랐을 뿐입니다. 이제 일반 한국인들도 북녘 땅을 통해 백두산에 오를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한반도 남북의 동포들이 서로 보다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날이 어서 와야 합니다. 남북한 통일 논의에서 그 비교 준거로 통일 독일의 사례를 인용한 예는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결론들은 대부분 “독일 통일 사례는 한반도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역사적 배경, 특히 내전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점이 주요한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때문에 동서독 분단 시기에는 남북한처럼 극한의 적대의식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하여 독일 통일 과정에 대한 이해 이전에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분단 경험의 차이입니다.
우리가 꿈꾸는 남북한의 “자유로운 왕래”는 독일에서는 분단 시기의 이야기입니다. 베를린에 장벽이 세워졌어도 서베를린의 젊은이들은 동베를린으로 넘어가 머리를 깎고 서점에 들러 책을 샀습니다. 전철을 갈아타기 위해 동서 베를린 사람들이 섞였던 프리드리히스트라세(Friedrichstraße)역에서 서베를린 사람들은 제품 가격이 더 저렴한 동베를린 매장에 들르곤 했습니다. 소위 “철의 장막”이라 불리던 동서독 분단 장벽 사이로 사람과 물품과 편지와 방송이 오가며 탈경계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당시 서베를린은 사회주의 동독으로 둘러싸인 섬과도 같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진영의 상징 공간으로 극한의 “자유”가 허용되었답니다. 서베를린 거주민은 서독으로부터 생필품 및 재정적 지원을 받았으며, 청년들은 군대가 면제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유롭게 살기 원하는 젊은 예술가나 지성인들이 군대를 피하기 위해 서독의 다른 도시에서 서베를린으로 옮겨오기도 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처참하게 파괴된 후 복구가 급속히 진행되던, 냉전의 현장이자 자유의 도시 서베를린에 마흔 살의 윤이상 선생이 파리를 거쳐 도착한 건 1957년이었습니다. 분단 초기였기 때문에 베를린 장벽도 세워지지 않았었습니다. 당시 서양 음악계는 전통의 틀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음악 작품들을 만들고자 하는 지난한 고민들을 할 때였습니다. 정통 서양 음악을 제대로 배우고자 했던 윤이상 선생도 이러한 시대적 압박을 맞닥뜨려야 했습니다. 자신만의 소리와 음악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고민에 시달리던 1958년, 윤이상 선생은 독일 다름슈타트에서 열린 당시 현대음악계에 선두 주자로 달리고 있던 존 케이지의 강연회에 참석합니다. 강연 제목은 “소통(Communication)”. 그리고, 그 강연에서 존 케이지는 “침묵”이라는 화두를 던졌다고 합니다. 한 연구자에 의하면 바로 이때 윤이상 선생이 불교에서의 해탈과도 같은, 자신의 음악세계를 열게 된 깨달음의 순간을 경험하셨다고 합니다.
서양 음악을 정통적으로 익힌 윤이상 선생은 자신의 문화적 뿌리인 한민족의 선율과 사상, 가치와 정신을 서양음악에 융합시키기 시작합니다. 그 전에도 몇몇 음악가들이 동서양 음악의 혼용을 시도했으나, 그것들은 그저 기계적인 결합이었을 뿐입니다. 반면 윤이상 선생은 동서양 음악의 질적인 융합을 최초로 성사시킨, 그래서 “현대음악의 새로운 길을 제시”한 음악가로 1960년대 초부터 이미 각광을 받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서베를린이라는 독특한 도시 공간에서 윤이상 선생이 경험하고 내면화했을 탈경계의 감수성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유럽 냉전의 교두보였던 분단된 동서베를린이지만 교류와 소통이 상대적으로 원활하여 공간적 탈경계를 이미 경험합니다. 이에 더하여, 동서양 음악의 혼합이 시도되었던 문화적 탈경계 역시 중층적으로 체험함은 물론, 본인 스스로가 그런 동서양 경계를 잇는 매개자로 각광받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동족상잔의 비극과 분단을 뼈저리게 경험했던 윤이상 선생에게, 유럽의 냉전 시공간은 보다 큰 이상과 감성을 지닌 세계적 음악가로서의 포부를 일깨웠으리라 봅니다. 그 탈경계 세계인으로서의 감성은 자기 민족과 역사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포용으로부터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한민족의 정서와 우주관의 원류를 직접 체감하고 싶었던 윤이상 선생은 1963년 베를린 중심가에 위치한 북한 대사관의 초청으로 북을 방문하여 고구려 유적인 강서고분묘의 벽화를 만나게 됩니다. 북현무, 남주작, 동청룡, 서백호! 그러나 그 후과로 예상치 못했던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야 했습니다. 바로, 1967년 동백림 사건으로, 당시 박정희 독재정권하에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에 의해 조작되어 자행된 불법 납치와 감금의 고난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동백림 사건은 독일을 중심으로 한 세계 음악계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습니다. 1968년 3월, 거장 카라얀, 스트라빈스키 등을 비롯한 전 세계 181명의 음악인들이 서명운동에 참여한 윤이상 구명 탄원서가 박정희에게 보내졌으며 각 신문들에 게재되었습니다.
당시 탄원서 내용 중 일부를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윤이상은 유럽뿐 아니라 세계 음악계에 가장 뛰어난 작곡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 그의 작품과 인품은 한국 문화와 예술을 한국 바깥 세계에 알리는, 매우 소중한 매개로 인정받아야 합니다. … 그가 없었다면 우리는 한국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통령 각하, 당신은 이 탄원서에 서명한 음악인들은 당신이 현재 건강이 악화된 윤선생이 자유롭고 건강한 사람으로 다시 그의 일을 할 수 있도록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것을 바란다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 국제 음악계는 윤선생이 필요하며, 동양과 서양의 중재자로서 그의 역할은 우리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한국 음악과 문화를 위한 대사로서 그는 매우 소중합니다.”
동백림 사건 당시 3차에 걸친 공판이 벌어진 1968년, 독일에서는 위와 같은 음악인들의 탄원서 이외에도 매우 다각적인 구명 노력들을 펼칩니다. 위 서명운동을 주도했던 함부르크 예술아카데미는 윤이상 선생을 회원으로 등록시켰으며, 서독일 방송국은 재판 중인 윤선생에게 작품을 의뢰함은 물론 한국방송국 총재에게 한-독 간 문화 관계를 심히 훼손하는 윤선생에 대한 재판을 철회하라 압박하고, 당시 베를린 시장도 박정희에게 전보를 쳤고, 윤이상의 작품이 연주될 베를린 필하모니에서는 한 음악도가 연단에 올라 윤이상 구명을 위해 일하는 대신 그 작품만 연주하는 것은 “정신분열”이라는 선언문을 낭독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음의 사진에서 보이듯 3차 공판 후 각종 독일 언론들이 그 부당함을 알리는 한편, 500여 명의 독일 학생들이 이를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독일 시민도 아닌, 한국에서 온 신예 음악인과 유학생 및 이주민들을 구명하기 위한 독일인들의 구명 운동 노력은 실로 지금 생각해도 감탄스러우며 그만큼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그 노력의 결과, 윤이상 선생을 비롯, 함께 납치되어 사형과 종신형을 선고받았던 피해자들이 1969년 3월 전격 석방되어 독일로 돌아오게 됩니다. 끔찍한 고문과 인간 이하의 취급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던, 그래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자, 옥중에서 자살을 시도하여 일 년 가까이 서울대 병원에 입원해 있어야 했던 윤이상 선생님. 그리고 1995년 돌아가시기 전까지 현대 음악 세계에 새로운 역사가 된 그분의 작품들. 이 모두는 1968년 독일에서의 구명운동이 없었다면 우리가 현재 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올해는 이러한 구명운동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리고 지난 시기와 달리 남북한이 화해와 평화의 새 역사를 열고자 하는 중차대한 노력이 시작된 해이기도 합니다. 탈경계 세계인으로서 분단된 남북한 민족과 역사를 모두 통 크게 껴안으셨던 윤 선생님의 미래지향적 열망이 현실화되려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최근 독일 당국은 남북한 문제에 대해 미국의 강경 노선을 더욱 지지하는 상황입니다. 하여 올해가 가기 전 베를린 윤이상하우스에서는 1968년 서명운동에 참가했던 생존 음악인을 찾아 당시 상황에 대한 증언을 듣고, 1968년 옥중과 병원에서 윤선생님이 창작하신 작품들도 일부 공연하고, 나아가 한반도 평화를 위한 독일 및 문화예술인의 역할에 대해 논하는 자리를 마련하려 합니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국제적 노력과 밑으로부터 힘을 모으려는 작은 시도에 불과하지만, 미래를 먼저 생각하는 여러분의 따스한 어깨동무와 관심을 기대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정진헌ㅣ어린이어깨동무 간사 출신으로, 미국 일리노이대학교 문화인류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하고, 독일 괴팅엔 소재 막스플랑크 종교와 민족다양성 연구원 선임연구원을 역임한 후, 현재 베를린 자유대학교 역사와 문화학부 한국학과 연구교수로 재직하며, 윤이상하우스 운영을 맡고 있다. 저서 및 공저로는, Migration and Religion in East Asia (2015), Building Noah's Ark (2015), 무엇이 학교 혁신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가 (2015), 한국의 다문화주의 현실과 쟁점(2007), 북한에서 온 내 친구(2002)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