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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린이어깨동무 Sep 04. 2024

부대끼며 맞이한 터닝포인트 일이삼

2024 청년 국제 평화 포럼 후기  - 평화교육교사모임 김지혜

1. 평화게임_동북아 여성, 평화, 안보 회의에 참여하여 UNSCA1325 지역행동계획을 세워라.     


평화 포럼에 오기 이 주 전쯤, 평화 게임 안내문을 받았습니다. 한글과 영어로 정성스레 작성한 문서였지요. 찬찬히 읽어보며 '준비하시느라 참 고생이 많으시구나' 싶었습니다. 저는 시뮬레이션에서 일본 측 참가자 역할을 맡았습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이미 해결이 끝났다고 주장하면서 여성, 평화, 안보를 위한 지역 행동 지침을 협상해야 한답니다.


평소 저는 일본이 과거의 전쟁범죄를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사죄하고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학생들과 수요시위에 참여하고, 프로젝트를 하기도 했으며, 매달 후원도 하고요, 심지어 캠프에 오기 '고작' 한 달 전에 정의기억연대 이사장님을 초청하여 전쟁과 인권에 관한 강의를 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평소의 행보와 완전히 반대되는 주장을 적극적으로 펼쳐야 한다니. 평화게임 안내문을 받고 머리가 지끈했습니다. 어깨동무가 분명 일부러 저를 골탕먹이려고 일본팀에 보낸 게 틀림없습니다. 


동북아시아의 외교 및 평화는 식민지배와 냉전을 거치며 다층적인 문제들이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에(물론 다른 지역들도 마찬가지지만요) 발생한 문제의 잘잘못을 개별적 범죄로 따지거나 경중을 매겨 매듭을 자르기 어렵습니다. 평화 시뮬레이션에도 일본이 저지른 것과 같은 현대사 전쟁 폭력 맥락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일본인 납치사건'과 '오키나와 미군 성범죄'를 협상으로 해결하라는 미션이 있습니다. 복합적으로 뒤섞였지만 뿌리가 같은 동북아 지역의 이슈를 파악하라는 주문인 것 같습니다.


실제 국제사회는 힘이 강한 국가의 이해가 강하게 반영되어 국제 이슈가 될 만한 문제들이 지역 이슈로 가볍게 끝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평화 게임은 다르겠지요. '평화와 인권'이라는 비정치적인 가치를 중심에 두고 현재진행형인 정치 맥락을 풀어갈 수 있지 않을까 희망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공존은 책임을 업고 걸어 나가야 하는 일이기에 일본의 인정과 사과는 화해를 향한 첫걸음이 될 수 있겠구요. 그래서 저는 포럼에 참가하기 전에 파랑에게 "그냥 위안부 문제 내주면 안 돼요?"라고 슬쩍 협조를 구해보았습니다. 그러자 파랑은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손사래를 치며 "안돼요, 안돼요, 선생님" 합니다. 하는 수 없이 저는 일본 정부의 신을 신습니다. 그것도 정말 제 신발처럼요.     


평화게임은 매우 치열했습니다. 막상 역할을 맡고 나니 협상에서 목표 달성을 하기 위하여 열심히 전략을 구상했습니다. 미래를 이야기하고, 행동계획에 military라는 단어를 넣냐 안 넣냐 치열하게 논쟁하구요, 처음 보는 청년들과 가면을 쓰고 목소리를 높이며 일본이 원하는 방향을 관철시키려 노력했습니다. 다른 국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려 7시간 동안 긴긴 혓바닥 싸움을 경험하자 비로소 국제협상 테이블에서 정치적으로 민감한 인권 문제를 최대한 외면하는 까닭을 알게 되었습니다.



국가 차원의 협상에서는 자국의 이해를 반영해야 하기에 주로 타국과 외교적 마찰을 일으키지 않을 부분을 교집합으로 하는 추상적인 합의문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니 정부가 아닌, 시민과 NGO의 범국가적 연대가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협상은 굉장히 다층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집니다. 중간 단계의 정치적 역할은 물 밖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수면 아래의 영향력을 만들어 냅니다. 여기저기의 인권과 평화 연대는 외면받은 진실에 힘을 합치어 이를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림1) 평화 구축의 행위자 『평화는 어떻게 만들어는가』 / 존 폴 레더라크 지음, 김동진 옮김 / 후마니타스

문제가 떠오를 때, 이를 어떻게 다룰지도 매우 중요합니다. 힘의 우위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상대를 비난한다면 폭력과 폭력이 상호누적됩니다. 그림책 '왜?'에서처럼 뿌리가 명확하지 않은 감정이 생각을 지배하여 무비판적인 전쟁으로 불거질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가장 나쁜 정치는 갈등과 대립을 이익을 위한 도구로 삼아 분열을 키우는 것입니다. 갈등은 갈등으로 물리치는 게 아니라 평화를 꼭 붙잡고 인류 보편의 가치를 길잡이 별로 띄워 많은 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새로운 지평을 창의적으로 넓혀 평화 속에 갈등을 포함시켜야 합니다. 평화를 만들어내는 행위자 피라미드(그림1)에서 내가 어떤 지점에 속해 있는지를 알고, 그에 맞는 전략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겠구요. 하루 내내 치열했던 피스게임을 정리하는 시간에 참여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2. 서현님과 자넷의 강연을 곱씹다.     


2박 3일간의 평화 포럼 일정이 끝나고 저는 순천의 한 카페에서 서현님과 캠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서현님은 첫날 여순사건 필드 트립을 할 때 임재근 소장님께서는 '이 일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되고 용서하기 어렵다'고 하셨는데, 바로 다음 순서에 강연을 했던 자넷이 용서와 화해를 말했기에 이 둘을 어떻게 통합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고 합니다. 저는 첫날에 늦게 도착하여 여순사건 필드트립을 함께 하지 못했는데, 서현님이 이야기를 꺼내주어 너무 고맙고 흥미로웠습니다. 그리고 어깨동무가 일부러 사람들에게 고민점을 던져주려고 두 강연을 배치한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자넷의 강연이 공중으로 날아가기 전에 서현님이 잡아주어서 행운입니다. 우리는 또 나름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세상에는 용서할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군사 독재시절에 국가가 힘없는 국민들에게 행했던 파시즘 행위들, 즉 여순 사건 같은 국가 폭력이 있겠지요. 이승만 전 대통령과 같이 실질적으로 많은 영향력을 미칠 수 있고 세상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많은 사람들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면 반드시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용서는 책임과 상호작용합니다. 그러니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기 전에 다른 사람들이 가해자를 용서해서는 안됩니다. 피해자가 용서하기도 전에 제 3자가 타인을 용서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 되기도 합니다. 여순 사건은 아직까지 진상규명이 명확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국가가 피해자들을 위해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이 지점에서 자넷은 용서라는 개념이 남아공의 흑인 피해자와 백인 가해자에게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는 말을 얹습니다. 피해자에게 용서는 '초대(invite)'이고, 피해를 준 사람은 '과거를 잊고 새롭게 나아가자'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서현님은 그 말이 참 충격이라고 합니다. 저도 제가 어디에 서 있는지 돌이켜 생각합니다. 평화게임에 몰입했던 어제도 떠오릅니다.     



그러나 책임과 용서는 상호작용할 뿐, 서로의 충분조건은 아닙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가해를 했던 행위자와 그런 행위를 받아주고 없었던 것처럼 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 뒤에 숨겨진, 그 너머의 사회적 욕망과 배경, 행위의 진실을 보고자 하는 노력입니다. 저지른 잘못에 있어서 증오의 화살을 모두 개인에게 조준하다 보면 이 사회에 내재되어 있는 폭력성을 다루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경계를 명확히 해야겠습니다. 폭력을 저지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과, 진실과 책임을 묻는 것과, 어디까지가 이승만인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인지, 선한 사마리아인인지 말입니다. 물론, 가해자 처벌보다도 피해 받은 사람들의 회복에 더 신경써야겠지요.


우리의 피날레는 '모두는 이어져 있다'로 치닫습니다. 자넷은 강연에서 이를 '우분투'로 표현했습니다. 서현님은 <우리가 박해자를 위해서도 책임질 수 있는가?>라는 책을 소개해 주시며, 레비나스라는 철학자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결국 우리는 모두가 가해자이자 피해자이고 모든 폭력들은 개인의 탓인 동시에 모두의 책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아직 이 책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누군가가 읽게 된다면 그 이야기도 어깨동무를 통해 들려주면 좋겠습니다.          


3. 결국 '나'     


화해와 용서, 개인을 넘어서는 영향을 생각하다 보니 결국 '나'로 돌아옵니다.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며칠간 감정이 휘몰아쳐 누군가에게 슬픔과 미움을 털어놓길 반복하였습니다. 자넷이 강조했던 용서와 화해가, 평화 게임에서 상대의 입장이 되어본 경험이, 서현님과의 아름다운 대화가 돌덩이가 되어 명치를 꾹꾹 눌러 아픕니다. 저는 평화를 배우고 이야기하면서 정작 제가 다루어야 할 문제를 평화와 거리가 먼 방식으로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평화의 지점을 늘려나가기보다 갈등을 회피하고 그대로 봉합하려 한 것은 아니었나도 반성합니다. 제가 겪은 일도 사람보다는 사회의 일이니까요.


과거엔 김수영 시인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읽으며 미움을 용서했는데, 오늘은 '백만송이 장미' 노래를 듣고 싶습니다. 미워하는 마음 없이 진실한 사랑을 할 때 피는 장미를 백만 송이나 피워야 한다니. 좀 힘들 것 같긴 합니다만 또 하나 피워보려 애써보렵니다. 신청곡은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으로 넘어갑니다. 평화란, 그런 것 같습니다.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을 계속해서 그려가는 것.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하니 평화는 내가 애써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겠지요. 애쓰는 동안 미움과 갈등과 반목과 외면이 계속되겠지만 때로는 혼자, 때로는 서로를 위로하면서 함께 지루하면서 고통스러운, 그러나 따뜻하고 후련한 것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평화가 아닐까 합니다.          


청년평화캠프 이야기를 써야 하는데 제 생각만 너무 많이 적은 게 아닌가 싶어서 좀 미안하긴 합니다. 나머지의 감상들은 다른 분들이 잘 써주시겠지요. 똑똑하고 멋진 사람들이 단체로 모여있었으니까 제 빈 공간을 잘 메꿔주시리라 생각하고 저는 마음대로 씁니다. 함께 모여 만들고 더불어 깨달을 수 있었던 늦여름 꿈같은 2박 3일이었습니다. 외국에서도 먼 길 마다 않고 삼삼오오 모여주시니 이 공간이 전 세계의 중심이자 희망이 되었습니다. 멋진 청년들과 평화 활동가들을 만날 수 있어 귀한 시간이었고, 함께 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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