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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biana May 02. 2020

뉴욕 하늘은 여전히 푸르다

비행 에피소드

아무것도 모르는척..뉴욕하늘


새벽녘 알람 소리 대신 손목시계의 진동이 먼저 울렸다.
알람 소리에 아가들이 다 함께 깨버리는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새벽 알람은 항상 손목시계가 먼저 울리도록 설정해둔다.
진동으로 잠을 적당히 깬 후에 핸드폰 알람이 울리면 그나마 힘들지 않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 한들 아침비행은 언제나 준비부터 출근까지가 곤욕이다. 반평생을 뒤죽박죽 정해지지 않은 출근 시간에 익숙해진 승무원의 삶을 살았기에 남들에게는 당연한 아침 출근이 꽤나 곤욕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뉴욕은 반드시 가고자 하는 의지가 가득했다.

그토록 가고 싶었던 팀 비행인데 하루 전 나는 스케줄에서 빠져버린 것이 아니가!
도대체 나를 왜! 타 팀원도 있는데 굳이 팀인 나를 비행에서 빼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나뿐만 아니라 팀원들이 여럿 뉴욕 스케줄에서 빠지고 대거 조정이 된 상황.
여차저차 스케줄을 원복 해보려 노력한 끝에 팀 일정인 3박 4일이 아닌 2박 3일. 엑스트라(승객 인원에 따라 근무에서 제외되어 승객 자리에 앉아가는 업무)로 바뀌며 그나마 살아남은 몇몇 팀원들과 함께 아웃바운드만이라도 할 수 있게 된 게 어디냐며 만족해야만 했다.
그 아침, 한달음에 날아간 공항에서 길게는 두 달, 짧게는 한 달씩 못 봤던 팀원들과 재회했다.
회사 사무실에서 방호물품인 방호복과 방호 고글 그리고 라텍스 장갑과 마스크도 수령하여 떠나는 그들의 뒷모습은 여느 때보다 비장했지만 실상 대형 항공기에는 FR(퍼스트 클래스) 0명, PR (비즈니스 클래스) 1명, EY(이코노미 클래스) 43 명만을 태우고 쓸쓸하게 인천 하늘을 날아 뉴욕으로 떠났다.

순환휴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5월.
첫 근무팀 추첨에 우리 팀이 당첨되어 5월을 마지막으로 짧았던 나의 복직 후 비행 인생은 1년 만에 당분간 휴업에 들어간다.
그러니 5월 팀 비행은 악작같이 빠지지 않고 다녀야 하지 않겠는가!

슬프게도 앞으로 남은 두 개의 팀 비행도 승객수에 따라 승무원 조정이 많이 이루어질 테고 대기 스케줄도 많으니 5월 한 달간 주어지는 스케줄에 따라 나의 임무를 다 하고 6월부터 백수 모드에 돌입할 예정이다.

14시간의 긴 비행시간을 승객 자리에 앉아가며 AVOD 영화 목록을 이리저리 살폈지만 딱히 당기는 영화가 없다. 불과 두 달 만에 장거리 엑스트라 근무만 5회 이상 하며 볼 수 있는 영화는 원 없이 봤고 이제는 기내 영화 리스트까지 외울 지경이니 휴대폰에 영화를 넣어가지고 왔으나 오래 앉아 있을라니 좀이 쑤셔서 이럴 바에는 일을 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예전 같았으면 가뭄에 콩 나듯 하는 엑스트라 근무는 비행에 지친 일상에 내리는  단비 같은 시간이었다.
만석의 승객 사이에 끼어 앉아 옴짝달싹 못해도 어떻게든 더 자볼까, 어떻게든 더 쉬어볼까 했던 그때가 불과 3개월 전 일상이었다.

다음 스케줄이 뭐냐고 묻던 승무원들의 대화 역시 달라졌다.

4개월 쉴 때 뭐할 거예요?
차라리 5월에 근무하게 된 게 더 좋은 것 같아요.
더 더워지면 마스크 쓰고 출퇴근하고 근무하는 것도 힘들겠죠?

기약 없는 일상을 그리며 유니폼 위에 방호복을 입고 고글을 쓰고 장갑을 낀 우리는 그래도 여전히 해맑게 웃는다.
인간을 사랑한 프로메테우스가 절망, 질병, 슬픔, 아픔, 질투, 죽음, 증오 등 인간을 괴롭히는 세상의  모든 해악을 감춰둔 상자를 호기심 많은 판도라가 열었고 우리는 쏟아져 나온 그 재앙 속에서 괴로워하면서도 웃을 수 있는 것은 프로메테우스가 마지막으로 넣어둔 희망이라는 녀석 덕분.
비바람을 이기고 피어나는 꽃처럼 희망은 언제나 고난 속에서 더 반짝인다.

확진자가 100만이 넘어간 뉴욕의 하늘이 오늘따라 너 높고 푸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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