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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biana Jun 24. 2020

세 아이로 얻은 훈장

엄마를 기다리는 아기올빼미

4박 5일의 간의 입원 그리고 퇴원 후 바로 친정으로 올까 하다가 아이들이 눈에 밟혀 집으로 갔건만 몸조리를 위해 당분간은 눈 질끈 감고 친정으로 피신을 하는 것이 현명한 것임을 단박에 깨달았다.
현관문 여는 소리에 달려 나온 아이들은 나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엄마다~~

폴짝폴짝


 기다리는 아기 올빼미 ’라는 동화 속에 나오던 세 마리 아기 올빼미처럼 날개를 파닥파닥 발을 콩콩거리며 버선발로 뛰어나온 아이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어~~ 엄마 건드리면 안 돼. 엄마 아직 아파


평소 같았으면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요 꼬마들을 번쩍 안아 들고 뽀뽀 세례를 퍼부었을 테지만 고작 얼굴 한번 쓰다듬어주는 것으로 반가운 마음을 대신했다.
통증이 가시지 않은 몸으로 어기적 어기적 집안을 둘러보니 엄마 없는 집이었음이 한눈에 티가 났다.
승무원인 내가 집을 비우는 것이 한두 번도 아니고 새삼스럽지도 않건만 그날따라 더 그렇게 보였던 이유는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는 나의 몸 상태 탓이었는지 모른다.

침대에 기대어 몸을 뉘이니 세녀석이 쪼르르 달려와 서로 엄마 옆을 차지하겠다고 쟁탈전을 벌인다.
세 녀석에게 팔을 내어주기엔 내 팔은 두 개뿐인지라 집에 오자마자 아이들을 중재하기에 여념이 없는 나를 발견했다.
대학병원이니 4박 5일이지 다른 병원 같았으면 최소 1주일 입원이고 나는 아직 누워있어야 할 몸 아니던가. 회복이 관건인데 이 집에서 ‘회복’이란 먼 나라 이야기다.

어어어~~ 엄마 넘어 다니면 안 돼!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진다.

행여나 아이들이 내 위로 넘어질까 움찔움찔 긴장을 하니 눕지도 못 할 일이다.
아이들아. 격하게 반가운 마음은 이 어미가 충분히 알겠으나 이 어미는 어찌해야 이 집에서 쉴 수 있는 게냐!

결국 하룻밤을 집에서 보내고 다시 친정행 짐을 꾸렸다.





참으로 험난한 임신, 출산 과정으로 나는 몹쓸 병 몇 개를 얻었다.
남들은 아무런 이벤트 없이 셋이고 넷이고 쑴풍쑴풍 잘도 낳는데 큰 애 임신 중 조산기로 한 달을 입원했고 조산을 장담하던 의사의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39주를 넘겼다.

며칠 후 양수가 터지고 2박 3일의 진통 끝에도 세상에 나올 기미가 없던 아기는 나의 배를 눌러대던 덩치 큰 남자 의사의 힘과 엄마의 처절한 진통과 울음에 항복하고 39주 5일에 세상 빛을 보았다.

항문까지 찢어진 나는 피를 심하게 쏟았고 정신을 잃어 신생아실로 옮겨진 아이의 면회도 하지 못했다. 피멍이 든 뱃가죽은 내 살이 아닌 듯 물컹했다.
오죽했으면  담당 의사 선생님은 난산 5% 안에는 충분히 들겠다며 책을 써봐라 하셨을까.


그 후 예상치 않게 찾아온 쌍둥이 아가들 역시 조산기로 병원신세를 지게 됐고 나의 배는 하루가 다르게 훅훅 커지니 이렇게 커져도 터지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배에 옷만 닿아도 쓰라리고 찢어질 듯  아파서 잠 못 드나 찢어지지는 않는 인체의 신비를 경험하며 험난한 병원 생활 끝에 제왕절개로 쌍둥이를 품에 안았다.

건강에 관한 자부는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그동안 체력 좋다 자신하던 딱 날 두고 하는 말이던가.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하는 성격이었던 것뿐이지 체력이 좋아서 끝을 본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 임신과 출산.

난산과 쌍둥이 임신으로 얻은 병.
죽을병도 아닌 것이 참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병. 오래 참고 오래 묵혀뒀던 병.

그 병을 하나씩 해결해보고자 했지만
수술을 하게 되면 절대 안정이 필요한데 아무리 주변에서 도와주신들 어린 쌍둥이들에게는 엄마손이 필요했다.

조금만 더 크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나는 수술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복직을 해버렸고 불편함을 감수하며 또 당연한 듯 살아왔다.
비행과 육아의 병행은 언젠가 수술을 하고자 했던 계획을 한낯 꿈으로 만들어버렸다.
두 마리 토끼는 건강이라는 가장 중요한 울타리를 넘어 이산 저산을 뛰어다녔고 토끼를 뒤쫓던 산자락 어딘가에서 정신을 차리고 허겁지겁 돌아오니 토끼가 넘나들었던 울타리는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아차 싶었다. 이제야...

수술을 해주셨던 교수님은 첫 진료부터 수술 시작하기 전, 수술 끝난 후  그리고 회진을 돌면서도 그동안 이 상태로 어떻게 살았냐며 타박을 하셨다.


“아가들이 아직 어려서 좀 기다렸어요”
“그런 사람이 비행기는 타고?”

하긴 코로나로 휴직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내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하고 여전히 비행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수술을 결심하고도 복직이 걱정돼서 언제쯤 일할 수 있는지 묻던 나였으니.
5년 이상의 휴직 끝에 가까스로 비행을 시작한 지 1년이 채 안됐으니 어쩌면 신입의 마음처럼 의지만은 불타고 있었는지 모른다.

경주마 같았던 지난날의 삶에 제동을 걸어준 이 모든 상황에 순응하며 지금은 절대 안정하며 회복에만 전념해야겠다.
엄마가 차려주시는 밥 먹고 욕창이 생길까 걱정될 만큼 화석처럼 꼼짝 않고 누워있는 이 시간이 곧 그리워 질날이 머지않았으니 이 상황을 즐기며..

임신 출산으로 인한 이 몸의 삐걱거림 조차 아들 셋 낳은 훈장이라 여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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