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집 유리 앞에 진열되어 있는 저 댕그란 크림빵은 한 번에 몇 개 정도 먹으면 질릴까. 어른이 되면 그 정도쯤 마음껏 시도해 볼 만큼 돈을 벌 수 있겠지? 언제쯤이면 너구리(학교 옆 문방구에 있던 게임기) 맥주 단계까지 깰 수 있을까. 맥주 단계까지 간다고 해도 너구리가 압정 세 개를 동시에 넘는 걸 내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그때까지 들키지 않고 엄마 지갑에서 몰래 동전을 꺼낼 수 있기를. 얼음땡 하다 자빠져서 깨진 무릎이 소풍 전까지는 나아지려나. 쫓아오던 술래가 분명히 민거 같은데 그 자식은 끝까지 안 밀었다네. 이번에 소풍 갈때 엄마가 김밥을 꼭 싸주면 좋겠는데. 요즘 엄마 기분은 어떤가? 김밥이라는 말을 입에 올릴 수나 있을까... 이런 중차대한 고민들로 몹시 바빴던 나의 국민학, 아니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밤이면 밤마다 나를 괴롭히던 질문이 하나 있었다.
‘사람이 죽으면 마음은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자려고 불을 끄면 질문은 어김없이 켜진다. 이불 속에서 죽음 체험으로 숨 참기를 한다. 읍--------하앜, 하악, 하아... 오늘도 역시, 숨차다. 못 참겠다. 이렇게 숨이 찬데 죽기 까지는 얼마나 숨이 차야 할까. 죽어서 몸이 사라지면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전설의 고향’에서는 갓을 쓴 저승사자가 데리러 오던데 그분이 다 알아서 인도해 주시려나. 그런데 그분 표정이 너무 무섭던데. 아, 죽기 싫다. 뉴스에서 북한이 파 놓은 땅굴이 발견되었다는데, 오늘 밤에 북한 공산당이 쳐들어오면 어떻게 하나. 우리 집 밑까지 땅굴을 파고 오면? 꼼짝도 안 하고 숨참기 하면서 죽은 척 하면 살 수 있나? ‘똘이장군’에서 보면 늑대처럼 생긴 공산당은 총알이 끊기지도 않는 총으로 아무 데나 막 쏘던데... 아, 오늘은 (오늘도) 죽기 싫은데. 아직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이불을 얼굴까지 뒤집어 쓰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으로 뒤척이다 보면 땀이 줄줄 흐르고, 숨은 막 차오르고. 할 수 없이 이불을 걷어내고 옆에 주무시는 할머니 곁으로 바짝 파고든다. 쭈글쭈글한 할머니 팔 위에 손을 올린다. 잠결에도 할머니는 내 손 위에 할머니의 손을 포개어 얹어 주신다. 눈을 꼭 감고 ‘하나님, 내가 잠든 동안 공산당이 안 쳐들어오게 해 주세요.’ 기도를 반복 반복 하다 보면 간신히 잠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도저히 잠을 자지 못하는 날에는 몰래 훌쩍이고 만다. 죽음이 무서워서 죽을 거 같아서.
죽음을 떠올리며 뒤척이는 밤은 성인이 되고도 나를 괴롭혔다. 죽음의 이유만 공산당에서 귀신에서 도둑에서 흉악범에서 묻지마 씨로 조금씩 조금씩 변했을 뿐, 죽음을 데려오는 시간은 변함없이 밤이었다. 밤이 싫었다. 밤이 안 온채 하려고 자면서도 조명을 켜 두는 버릇이 생겼다. 혹시라도 잠에서 깨 눈을 뜨더라도, 어둡지 않아 오늘은 죽음이 오지 않을 거야, 나를 안심시켜주려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홀로 있는 건 상상만으로도 숨이 찼다. “실은 나... 혼자서 못 자. 잘 때 손이 닿는 거리에 누군가 있어야 해.” 프러포즈를 하는 남편에게 이야기했다. 내 두려움의 깊이를 알 리 없는 남편은 피식 웃었다. 결혼 후 남편이 숙직으로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날은 어김없이 잠을 설치고 악몽을 꾸었다. 나, 또는 내 곁 누군가가 비참하게 죽거나 죽지도 못한 채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꿈, 나를 일 년 동안 스토킹 했던 그가 찾아와 자는 척하는 나를 보며 비웃는 꿈, 바닥에 발이 닿는 높이를 오르내리며 간신히 날아 끊임없이 무언가를 피해 도망치는 꿈. 잠에서 깬 나의 눈과 모공을 통해 꿈속에서 느꼈던 그 습한 기운을 절절히 뿜어내고서야 겨우 끝이 나는 그런 꿈. 그때마다 누군가의 팔이 간절했다.
며칠 전, 막 배송된 사진집(<낸 골딘>, 귀도 코스타)을 들고 급하게 길을 나섰다. 기다렸던 터라 궁금한 마음에 지하철 안에서 비닐을 뜯어 펼쳐 보았다. 여장 남자, 에이즈, 섹스, 성기, 담배, 폭력, 물 속 나체, 동성애... 허허,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핀다. 내 쪽으로 흘낏거리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책을 나만 볼 수 있는 정도로 좁게 펼쳐서 다시. 분명 처음 보는 사진인데 어쩐지 낯이 익다. 왜일까? 곧 알아챈다. 수 없이 많은 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을 못해 결국 나를 울게 만들던 것들. 그것들이 다른 형상으로 거기에 있다. 어둠, 습함, 두려움, 고통, 슬픔, 외로움, 불안... 그리고 죽.음.이.있.다. 하얀 침대 시트 위에 유난히 얇고 기-다랗게 투욱 놓아진 팔. 사진 속 공간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여기까지야.’ 무심히 삶과 죽음을 경계 짓듯. 그리고 그 끝에 가지런히 펼쳐진 손가락. 깃들어 있던 ‘나’가 떠나고 있다. 쨍한 대낮에 마주하는 생생한 죽음이라니. 사진과 대비되는 나의 팔을 바라본다. 살.아.있.다.살.고.싶.다.난...아.직.
중년의 나이가 되고부터는 죽음을 화두에 두고 점점 더 자주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게 된다. 나만 빼놓고 열릴, 내가 주인공이 되는 장례식 이야기도. 더는 밤새 불을 켜 놓아야 한다든지, 누군가의 팔을 간절히 원하며 잠을 설치지 않는다. 악몽을 꿀 때가 가끔 있지만 이제는 누구와 자는 것보다 혼자 자는 게 훨씬 편하다. 하지만 난, 여전히 죽음이 두렵다. 다만 죽음이란 어떤 노력으로도(필살의 숨 참기 스킬로도) 피해 갈 수 없다는, 초등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지만 받아들이지 않으려 몸부림치던 그 사실을, 이제야 순순히 받아들이는 중이다. 그렇지. 살아있는 우린 모두 조금씩 죽어가는 중이지. ‘죽기 싫다.’에서 ‘살고 싶다.’로 노선을 변경하여 살기로 한다. 어떤 노선이든 결국 같은 종착지 이겠지만. 종착지까지 가는 동안 얼굴 가득 해를 받으며 한낮의 창을 통해 보이는 싱그러운 것들을 실컷 바라보고, 밤이 오면 밤에만 빛나는 것들을 하나하나 찾아보고, 가끔은 창을 열어 낯선 바람의 냄새도 느껴 보고, 여전히 낯선 것에도 설레는 나에게 안도하고, 곁에 앉은 당신들과의 시시콜콜한 이야기에 울기도 웃기도 하며, 또 그 이야기를 잊지 않으려 틈틈이 글로 쓰며... 그렇게 난, 하루치만큼씩 기꺼이, 죽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