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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임 Jul 16. 2023

흰 뼈와 함박눈

기억에 남는 마지막 - 1


 막상 무엇을 적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한글파일을 켜놓고 커서만 가만히 보고 있었습니다. 3년 전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적었던 짧은 글이 생각났습니다. 그 글의 첫 시작도 깜박이는 커서였어요. 최근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셔서 더 기억이 나나 봐요.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데, 저희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비석에 이름이 남았습니다. 돌로 새겨져 지워지지 않을 이름. 그래서 비석에 이름을 새기나 봅니다. 마모될지언정 사라지지는 않으니까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나이가 여든이 넘으셨었어요. 이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모두 나이가 들으셨고, 그분들을 기억하는 사람 중 가장 어린 축에 속하는 게 저겠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던 날에 대해 조금 적어볼까 합니다.


 저는 제 주변에 누군가가 돌아가시면 그날이 그렇게 기억에 남아요. 평생을 함께할 거라고 무의식 중에 생각하던 사람들의 죽음은 생각보다 너무 충격적이었거든요.


 비석에 새겨진 이름 말고도 다른 것들도 남아있었으면 합니다.

 먼저 외할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흰 화면 위 검게 깜박이는 커서를 보고 있자니 함박눈이 내리던 날이 생각납니다. 눈꺼풀 위로 떨어지는 눈을 맞으며 눈을 깜박였어요. 눈을 감아도 희뿌연 하늘이 보였습니다. 날이 찼습니다. 걸쳐 입은 패딩 사이로 찬 기운이 흘러들어왔습니다. 차들이 하나둘씩 외할머니댁 앞마당으로 들어왔습니다. 이미 온 차들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친척들이 시골에 모두 모인 건 얼마 만일까. 제 기억으로 17년이 넘었었던 것 같습니다.      


 다들 정수원에서 외할아버지를 화장시키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처음으로 화장이 끝난 후의 뼈를 보았습니다. 외할머니는 못 보겠다며 엄마와 동생과 함께 차에 남았습니다. 뼈를 곱게 빻기 전 화장터에서 재를 모아 유가족들에게 보여줬습니다. 고 김 씨의 뼈가 맞나요? 화장을 담당해 주시는 분이 물었습니다. 큰 외삼촌이 맞다고 대답했습니다.      


 뒤섞인 눈물 사이로 장례지도사는 그 나이의 연세치고는 뼈가 희다고 말했습니다. 흰 뼈. 다 타지 못한 외할아버지의 엉치뼈, 척추뼈들이 보였습니다. 내 두 눈으로 평생 누군가의 뼈를 볼 거라고 생각조차 못 했는데.      

 처음 정수원으로 들어올 때 장정 6명이 오동나무 함을 이고 왔는데, 이제는 한 사람의 품 안에 들어가는 크기가 되다니. 외할아버지는 정말 뼛가루가 된 걸까요. 저 셀 수 없는 묻혀버린 수많은 기억은 다 어디로 가는 걸까요.      


 사실 저는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많지는 않습니다. 엄마는 생각보다 자주 시골에 가지는 않았거든요. 한 번 텔레비전에 출연한 적도 있으셨는데, 윗마을 할아버지와 아랫마을 할아버지의 80년 우정에 대한 다큐멘터리였습니다. 윗마을 할아버지가 주인공이었고, 아랫마을 할아버지가 저희 할아버지였는데 두 분이 서로 허허롭게 손을 흔들며 헤어지는 모습이 기억납니다.     


 이모는 정수원에서 할아버지를 화장하는 동안 다큐멘터리를 찾았습니다. 이제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게 이 영상밖에 없다며 다섯 남매가 옹기종기 모여 그 영상을 보았습니다.      


 마치 우리에게 손을 흔들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외할아버지는 갑작스레 돌아가셨습니다. 그래도 다들 언젠가 돌아가실 거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 그게 지금일지는 몰랐을 뿐이었지요. 몇 년 전부터 암으로 고생을 하셨거든요. 그럼에도 완치판정을 받으셨었어요. 이번에 병원에 들어가시게 된 건 단순 염증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의사가 간단한 수술이라고 걱정할 필요 없을 거라고 말했다고 들었습니다.      


 다만, 연세가 있고 이미 병환이 있어 쇠약해진 몸이 그 수술들을 다 감당하지 못하셨나 봅니다. 영정사진을 찍지도 못하셨습니다. 친척 오빠가 들고 오는 영정사진은 환갑잔치 때 외할머니와 함께 찍었던 사진이었습니다. 시골 안방 티비 위에 걸려있던 사진이 이제 검은 줄이 쳐진 채로 친척 오빠 손에 들려있었습니다.     


 외할머니는 김장할 당시만 해도 할아버지가 걱정된다며 우셨습니다. 마을 분들이 품앗이하러 오셨을 때 빨간 장갑을 손에 끼고 고춧가루 범벅이 된 손으로 흰쌀밥이 김치라도 먹여야 하는데 하면서 아이처럼 엉엉 우시던 모습이 선명합니다. 다들 몸 건강히 돌아올 거라고 대답했지만, 그건 결국 현실이 되지 못했습니다.     


 친척 오빠는 영정사진을 들고 집안 곳곳을 돌아다녔습니다. 외할아버지가 주무시던 요 위, 창고방, 이제는 소가 없는 외양간 터, 한 바퀴를 돌고 인삼주를 한 잔 올린 후 집 밖으로 나섰습니다. 장지는 시골집 바로 옆에 있는 밭이었습니다. 겨울이라 휑한 밭을 지나 양지바른 곳으로 올라갔습니다.      


 밭 아래에는 마을 분들이 이미 천막을 치신 채 뜨끈한 육개장을 먹고 계셨습니다. 영정사진을 들고 장지로 가는 길 갑작스레 눈이 내렸습니다. 이제까지는 오지 않던 눈이 하나씩 떨어지더니 점점 굵어졌습니다. 길 위에 어느새 흰 눈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외할머니는 인삼주를 한잔하고 나오시더니 가슴을 탁탁 치셨습니다. 검은 액자 위로 눈이 쌓였습니다. 장지에 도착했더니 장정 두 분이 삽을 들고 대기하고 계셨습니다.      


 눈이 오는 날, 우리는 검은 소복을 입고 검은 액자를 든 채 얼어버린 땅을 파고 있는 걸 보고 있었습니다. 언 땅에는 삽이 들어가기 힘겨워 작업해 주시는 분들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습니다. 엄마의 등이 작아 보였습니다. 동생은 핫팩을 흔들어 엄마의 주머니에 넣어주었습니다.      


 어느 정도 땅이 파지자 유골함을 넣었습니다. 원래 유골에 흙을 섞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삽을 드신 두 분은 유골에 흙을 섞더니 함이 가득 찼을 때 덮개를 닫았습니다. 소복이 쌓여있던 흑을 다시 퍼 유골함 위로 흩뿌렸습니다. 유골함은 점점 땅 밑으로 잠겨 들어갔습니다.     


 할머니는 그 광경을 보고 계시다가 천막으로 돌아가시기 위해 몸을 돌려 밭으로 내려갔습니다. 눈 때문에 미끄러우셨는지, 다리에 힘이 풀리신 건지. 얼어버린 땅 위로 넘어지셨습니다. 큰외삼촌은 할머니를 천막으로 모셔다 드리고 왔습니다.     


 흙이 다 덮였습니다. 유골함은 흙 밑으로 가라앉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수장당해 더는 찾아갈 수 없는 마을처럼 할아버지의 유골함은 그렇게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떠났습니다. 비석이 유골함 위에 내려앉았습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지요. 경주김공휘. 흰 뼈를 가진 할아버지의 이름은 비석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왜 사람은 죽으면 이름만 남을까요. 조금 더 많은 것들이 남으면 좋겠는데. 가끔 할아버지의 어린 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들이 남아 나중에 조금 더 선명하게 떠나간 사람을 그릴 수 있으면 좋겠는데 말이에요.      


 땅이 얼어 봄이 오고 날이 풀리면 다시 한번 땅을 단단하게 다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단단하게 다지면 다질수록 유골함은 깊게 잠기겠지요. 들짐승들이 유해를 파내지 않도록 다져야 하지만, 단단해지면 단단해질수록 점점 기억이 잊힐 것 같아 썩 좋지 않았습니다.


 눈이 점점 더 많이 왔습니다. 빨갛게 얼은 손으로 시린 볼에 입김을 불며 이 과정이 다 끝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비석 뒤 영정사진을 세워놓고 집에서 가져온 사과, 배, 할아버지가 좋아하던 전 등을 놓고 돗자리 위에서 절을 했습니다. 거의 마무리가 되었을 때 갑자기 큰 외삼촌이 다 같이 사진을 찍자고 했습니다.      


 마지막을 남겨놔야 한다면서요.      


 주섬주섬 다들 영정사진 뒤로 섰습니다. 사진을 찍었습니다. 카메라 셔터가 눌리고, 눈꺼풀 위로 눈이 떨어졌습니다. 할아버지의 마지막은 어떻게 남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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