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 책장을 덮고 보니 그 이름마저도 아련하게 느껴진다. 스토너라는 책은 가난한 소작농의 집안에서 태어나 1920년대 미주리대학교 영문학 교수로 재직한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책 제목 자체가 그 남자의 이름이다. 윌리엄 스토너. 처음 이 책이 유명한지 정말 몰랐다. 책을 처음 알게 됐던 건 지켜야 할 세계라는 책을 읽은 후였다. 작가의 말에 '스토너 같은 소설을 쓰고 싶었다.'라고 적어 놓았길래 그런 책이 있구나 하고 넘어갔었는데, 독서모임에서 전기같은 이야기로는 스토너를 따라갈 수 있는 소설이 없다고 평하는 걸 듣고 읽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혼불문학상 대상을 받은 지켜야 할 세계도 중학교 국아교사 윤옥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는데, 1950년대 한국 근현대 교육에서 마주해야 했던 부조리와 장애가 있던 동생, 아무 맏 없이 떠나버린 엄마, 제자의 아이를 키워야만 했던 윤옥의 평탄하지 않은 삶에서 맞닥뜨려야 했던 고난들을 이야기한다. 그 안에서도 윤옥은 언제나 옳은 선택을 하기 위해 고군분투를 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스토너라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에 영웅담을 읽은 것만 같던 윤옥의 이야기에 스토너도 영웅적인 일대기를 가진 소설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스토너는 윤옥과는 조금 달랐다. 윤옥은 읽고 나서 와 어떻게 저렇게 살지. 대단하다 하고 감탄을 했던 인물이었다면, 스토너는 와 왜 저렇게 살지. 답답해 죽겠네.라고 생각하게 된달까. 둘은 미련할 정도로 바보 같은 사람들이었지만, 윤옥의 삶이 결국에 자신의 선택에 만족하며 성공한 삶처럼 그려졌다면 스토너의 삶은 결국에 실패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인 것 같다.
스토너는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그것을 견뎌내는 인물이었다. 미련할 정도로 인내심이 강하고 성실한 사람. 첫눈에 반해버린 이디스와 밀어붙이듯 결혼을 하고 이디스가 자신과 잠자리를 가지고 나서 화장실에 토를 할 정도로 그를 거부했어도, 그녀가 결혼생활 내내 그에게 히스테릭하게 굴어도 그는 이디스를 끝까지 책임지고 배려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영문학과의 학과장이 된 로멕스가 아끼던 제자를 스토너가 봤을 때 능력이 없어 제적을 시키려고 했을 때도, 그는 학과장이라는 위치에 굴복당하지 않고 결국 자신의 신념을 지켜낸다. 행복이란 게 남지 않은 결혼생활 속에서 캐서린이라는 여자를 만나 사랑을 느꼈을 때도 결국 가정을 지키기 위해 캐서린을 떠나보낸다.
그러면서 그는 점차 몸도 마음도 시들어만 간다. 나는 처음에 스토너가 정말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이디스랑 이혼을 하지. 로멕스에게 조금 굽혀보지. 그러면 다른 교수도 학부생들도 그를 조금 더 대우했을 텐데. 캐서린을 붙잡아보지. 왜 스스로 힘든 선택을 자처해서 그늘에 있는 해바라기처럼 시들어갈까. 왜 스토너는 저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스토너가 죽어가면서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을 읽고는 머리가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너는 무엇을 기대했나?
마치 나에게 한 질문처럼 느껴졌다.
나는 무엇을 기대했나.
스토너가 행복해지기 위해 자신의 신념을 바꾸길 원했나? 이디스와 이혼을 하고, 자신의 딸을 남겨둔 채로 캐서린과 행복하기를 바랐나. 학과장의 권위에 눌려 로멕스에게 자신의 신념을 굽히기를 바랐나. 그가 어떻게 살기를 바랐나. 내가 바라는 데로 살았을 때 그가 정말 행복해졌을까? 저 질문을 읽고는 나는 내가 답답하다고 생각했던 그의 삶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봤다.
만약 나였다면, 아마 스토너의 상황에서 아이를 남겨 두고 이혼을 하고 불륜을 저질러도 나의 행복을 위해서라고 자위했을 것 같다. 내가 평범한 사람처럼 느껴졌기에 고난 앞에서 상처받지 않기 위해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권위에 짓눌려 자신의 선택을 바꿀 수도 있는 나 같은 사람들의 선택이 결국 좋은 결과로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건 아닐까. 나 같은 선택을 해도 정말 스토너가 행복해졌을까. 그런 걸 기대했던 걸까. 책장을 덮고 나서도 여운이 남았다. 또 다른 관점으로 스토너를 바라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작가 존 윌리엄스는 "나는 그가 진짜 영웅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스토너를 슬프고 불행하다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의 삶은 아주 훌륭한 것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왜 작가는 스토너를 보고 영웅이라고 말했을까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사실 스토너를 조금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전쟁을 겪은 모든 사람의 삶을 대변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처음 스토너를 영문학의 길로 이끌어줬던 교수 슬론. '셰익스피어가 자네에게 뭐라고 하나, 스토너 군?'라고 대화를 건넸던 슬론은 1910년대 1차 세계대전이 터져 수업을 듣던 학생들이 전장으로 나가 부고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시들어갔던 모습이 스토너가 삶에서 시들어간 모습과 교차되어 그려졌다.
전쟁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재앙과도 같다. 사람들의 몸에도 생채기를 내지만, 타인을 증오해야 하고 죽여야만 하는 상황들이 마음에도 깊은 상흔을 남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단지 몸을 웅크린 채 이 재앙이 어서 지나가길 기도하고, 견뎌야만 하고, 그렇게 살아나가야만 한다. 아무리 옆에서 자신을 두들기고 몸에 칼을 꽃아 넣고 마음에 못을 박아 넣어도 견디는 것 밖에는 할 수 없다. 누구도 그 결정을 번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당시에 두 번의 전쟁이 일어났다. 모든 이들이 1차 세계대전의 상흔이 아물기도 전 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아마 모두가 원치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겪어야만 했던 일들이었다. 그래서 미련하게 또 견디고, 견딜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그 거대한 폭력에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일상을 침투해 오는 슬픔을 감내해야만 했을 것이다.
무엇을 기대했나.라는 이 질문 속에 답이 있었다. 삶이 기대만큼 살아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계속 기대를 하며 주어진 삶을 미련하게 견디며 살아가야만 한다. 스토너는 첫눈에 반한 이디스와의 평온한 결혼생활을 기대했고, 연구의 열정을 가지고 따라오는 제자들의 모습을 기대했고, 딸이 집으로부터 도망치듯 임신을 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아름답게 결혼식을 올리는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는 묵묵히 자신에게 처한 상황을 감내했다. 그래서 작가가 그를 영웅이라 칭한 것 아닐까 생각했다. 도망치고 싶음에도 그 자실에서 자신이 기대하지 않았던 모든 상황을 견뎌내며 삶을 감내했기에. 그리고 아마도 그 시대를 견뎌온 모든 이들에게 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포기하지 않고 견디는 것. 가장 어려운 일을 해냈던 사람들이기에. 모두가 영웅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