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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아 Nov 24. 2021

죽음 앞에 나는......

어느새 옷깃을 여미는 서늘한 찬바람이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고 지나더니 앞마당에 떨어지는 낙엽이 하나 둘 늘어 난다.  

산촌의 다랭이 논에도 푸른 초록빛은 자취를 감추고 상투머리 삐죽한 모양에 누렇게 빛이 바랜 벼 꽁지가 을씨년스럽고 황량한 기분을 만든다.

들녘은 생기 있는 황금빛으로 출렁인가 하더니 어느새 생기 잃은 누런 빛을 잃어가고 사이사이에 떨어진 갈색의 낙엽들만이 뒹굴고 있다. 

생명의 기운은 땅 속으로 스며들고 길고 긴 겨울을 이기고 다시 봄이 되어야 생명의 싹을 보게 되리라!

세상 모든 사물은 자연의 법칙대로 살아간다. 화려한 여름의 싱그러움은 어느새 빛을 바랐고 고요한 침묵처럼 무겁게 깔리는 늦가을의 정취가 살아온 생을 돌아보게 한다. 

어느새 오십의 중반을 넘어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한 갑자를 살아가고 있다. 

어릴 적 육십갑자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고 그저 할아버지가 가르쳐주시던 명리니 사주니 주역이니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지만 말똥말똥한 눈으로 할아버지를 바라보던 그 어린아이는 곰방대를 물고 주역 점을 가르쳐 주시던 할아버지의 나이를 향해 달려간다. 

할아버지는 곁에 계시지 않는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도 곁에 계시지 않는다. 

사람도 자연도 계절의 변화처럼 태어나고 자라고 사라진다. 

나는 어느새 서너 살 아이들에게 할아버지라는 다소 나이보다 이른 호칭을 듣게 되었다. 

웃음이 나기도 하지만 서글퍼지기도 한다. 

조금 일찍 결혼한 동창들은 사위를 보니 외손주를 보니 하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어느새 초로의 나이가 서글퍼진다. 

꽃은 피고 그 꽃은 지고 땅에 떨진 꽃잎은 썩어 거름이 된다.

어느 날 무심히 하늘을 보다 작은 새 한 마리가 힘겹게 날개 짓을 하나 싶더니 땅으로 곤두박질친다. 앞마당에 떨어진 작은 새는 잠시 날개를 푸덕거리다 미동도 하지 않는다. 

다가가 쳐다보니 눈은 감겨 있고 나무 지팡이로 새를 꾹꾹 찔러보지만 새는 몸이 점점 굳어 간다. 

죽었다!

죽음!

햇살 드는 마당에 땅을 파고 묻었다. 

새의 수명도 모르고 다른 새의 공격도 받은 흔적이 없으니 그저 자연의 순리대로 죽었으리라 짐작만 한다. 

삽을 쥔 주름진 손등에 주름이 어느새 나이를 말해 준다. 

어느 순간 이 새처럼 생을 마치리라 생각하니 슬프기도 하고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순간 죽음도 또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을 하니 오히려 마음이 평온해진다.

그 새를 묻은 땅을 내려다보며 새의 몸은 썩어 거름이 되고 그 새의 작은 생각은 바람처럼 떠 다닐 것이다. 


 죽음을 생각 조차 하기 싫은 사람도 있지만 자연이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움직이고 달이 차서 기울 듯이 사람을 포함한 모든 사물은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그 사라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고민과 죽는 날까지나에던뎌인 숙제 같다.

그 사라짐을 안다면 삶은 좀 더 진지해질까?

그 사라짐을 안다고 하더라도 삶은 진지해지지 않을 것이다. 망각의 동물이기 때문이다. 영원히 살 듯이 살아가지만 결국 사람은 유한한 존재일 뿐이다. 

얼굴 앞면 정도 아는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는 소식을 접한다. 특히 내 또래의 사람의 소식을 들으면 기분이 착잡하다. 열심히 생을 살았던 사람들이다. 애착도 강하고 삶의 의지도 강했던 사람들이다. 

나처럼 텃밭이나 가꾸고 책 읽고 글이나 쓰고 마음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남들이 보면 열심히 살던 사람들이다. 

나이를 잊고 열심히 사는 사람에게 박수를 보낸다. 나 같은 게으름뱅이와는 결이 다르다. 

나는 또 다른 한 편 이런 생각도 해 본다. 

그 삶에 욕심이 들어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삶에 애착을 두지 않았을까? 자식이 고생스럽게 살지 않게 하기 위해 좀 더 남겨 주려고 애쓰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친다. 

내 삶을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해 산다면 그만큼 고달픈 인생도 없다. 남에게 보란 듯 과시하며, 자신은 남보다 돈을 버는 재주가 있다는 식의 자기 과시에 빠진다면 마치 마약에 자신의 영혼이 썩어 가는 줄 모르고 그 환락에 빠지는 거와 마찬가지 일 것이다.


죽으면 뭐가 남게 되는지 죽은 뒤에 그 사람은 아무 대답도 없다. 

그래서 남은 사람은 죽음이 알 수 없는 미래이기 때문에 두려운지 모른다. 

죽음이 두렵다고 생각하지 말자.

어느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죽음이니 받아들이자.

다만 그 죽음이 오기 전까지 진정으로 나만을 위한 삶을 살았으면 한다. 

젊은 시절에는 나도 앞 뒤 쳐다보지 않고 질풍노도와 같았고 달리는 폭주 기관차처럼 살았다. 

재물도 있었고 한 순간에 재물도 잃어버렸다. 남은 것은 나뿐이다. 

아내도 자식도 친구도 나를 대신해 줄 수 없다. 

어느 순간 나의 질주를 멈추고 잠시 뒤를 바라보니 나뿐이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저 나를 둘러싸고 있을 뿐이었다. 

인간이라는 섬에 홀로 앉아 있는 내 모습을 보았다. 

그 뒤로 나는 달리지 않는다. 조용히 홀로 내가 잊고 있던 나의 영혼과 대화를 시작했다. 

마음은 평온해지고 욕심은 사라졌다. 거대한 용트림을 하던 욕망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조용한 자연이 나에게 속삭이듯 말한다. 

깊은 곳에 잠자고 있는 자신을 깨우라고 말한다. 영혼의 맑은 샘을 찾아 마시라고 말한다. 

회색빛 숲을 떠나 초록의 산속에 나를 던졌다. 회색 빛 도시가 나의 색이라는 환상에서 깨어나 파란 하늘과 초록의 자연 속으로 돌아왔다. 

나는 죽음을 새로운 시작을 위한 끝이라 생각했다. 오히려 설레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팔십을 바라보는 칠십 대 후반의 돈 많은 노인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건강에 좋다는 음식이나 약 그리고 건강에 좋다는 환경에서 살려고 온갖 노력을 하는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리고 하던 일을 더 크게 하려고 그 나이에도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았다. 주변 사람들은 그가 부자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도 자신이 이루어낸 부에 대해 긍지가 대단했다. 그 뿐이다. 그에 대하여 말할 게 없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의 인품이나 인격을 전부 돈으로 보는 셈이었다. 

그는 이제 육십이 내일 모레인 내가 그렇게 애착도 없고 그저 하루를 사는 모습이 한심해 보였는지 열심히 돈을 벌라고, 그 나이 같으면 자기는 돈을 벌기 위해 모든 것을 던진다며 나에게 충고를 했다. 

그는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보지 못했다. 모든 삶이나 생활은 돈과 연결되었다. 

그야말로 속물이었다. 물질을 숭상하는 시대에 딱 알맞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렇게 돈을 벌고 나면 그다음은 뭐가 있지요?"
그는 순간 내가 던진 대답에 답을 못했다. 

자신을 보지 못하고 살았다. 그저 돈이 최고의 가치라 여기며 살았다. 그는 술 한잔 못하며 책 한자 읽지 않는 사람이다. 눈을 뜨면 나와서 일하고 해가 지면 집에서 밥을 먹고 잔다. 다시 해가 뜨면 눈을 비비고 일어나 일을 하고 해가 지면 밥을 먹고 잠을 잔다. 한마디로 계급이 존재했던 시절의 노예와 같은 삶일 뿐이다. 

그 생활이 삶의 전부였다. 통장에는 잔고는 늘어난다. 그러나 콜레스테롤 수치가 올라 간다며 고기 한 점 먹지 않는다. 

말로는 좋은 일 해야지를 그렇게 부르짖고 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베풀지도 못했다. 조금 더 벌고 좋은 일에 돈을 써야지 하며 곧 팔십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돈을 벌기 위해 밤낮으로 분주하다. 

자신 뿐이었다. 찾아오는 이도 없다. 

그 삶이 좋은 삶인지 아닌지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어느 날 재미삼아 자기 사주 한 번 봐달라고 했다. 사주를 믿지 않는 사람이 의외다 싶었지만 공부할 좋은 기회다 싶은 생각에 얼른 사주를 봤다. 

아주 놀라웠다. 

재물은 있으나 재물이 없는 사주였다. 사주명리학에서는 財多身弱(재다신약)이라는 사주로 재물은 있으나 재물이 늘 허공으로 사라지거나 쓸 수 없는 사주였다. 재물에게 힘을 주는 식신의 기운이 없기 때문이다. 

남들에게 좋은 소리 못 듣고 인색하다는 말을 듣는 이유도 사주에 다 있었다. 어쩌면 사주에 재물이 없는 사람보다 더 불쌍한 사주였다.  

하도 자가 자랑을 많이 하길래 얄밉기도 해서 나는 한 마디 던졌다.

"죽어 다 가지고 가시렵니까? 자식 좋은 일만 하시네요!"
하고 한마디 비수처럼 던졌다.

순간 그는 말문이 막혔던 모양이다.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죽음이라는 말에 그도 잊고 있었던 자신의 사라짐을 느꼈을 듯하다. 그의 얼굴 표정에 한 순간 뭉크의 "절규"에서 나오는 귀를 막고 다리에 서있는 사람의 표정이 생각났으니 말이다. 

사람은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생각하기 싫기 때문에 하지 않는다. 

죽음에 대해 진지한 생각을 한다면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조금은 달라질 수 있다. 

만일 죽음에 대한 생각을 조금이라도 묵상한다면 지금보다는 좀 더 나은 세상이 되어 있지 않을까?


나는 느리게 사는 삶을 택했다. 그리고 늘 죽음이 내게 찾아왔을 때 나는 어떻게 마음을 가질까를 생각하며 살기로 했다. 

느리게 사는 삶에는 욕심이 따라오지 않는다. 아니 따라오지 않는 게 아니라 욕심이라는 놈이 속이 터져 그만 저 멀리 가버리고 말 것이다. 

죽음을 생각하며 공포를 가지고 살 필요는 없다. 다만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어떻게 영원처럼 살까 생각하는 단초는 될 수 있을지 모른다. 

늦은 가을 불어오는 찬 바람에 잠시 삶과 죽음이라는 이야기에 마음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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