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이라는 이름의 기억

by 마리아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인 생존 행위다.
하지만 조금만 다르게 바라보면, 음식은 사색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음식은 곧 냄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냄새는 기억의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린다.
어린 시절 명절이 다가오면 마당에는 고소한 기름 냄새가 가득했다.
그 냄새를 맡으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풍경이 있다.
마당 한편에 널려 있던 음식 재료들,
그리고 문간방에 수줍게 앉아 있던 곱디고운 새색시.
어린 눈에 그녀는 마치 하얀 모란 한 송이 같았다.
기름 냄새와 함께 떠오르는 그 모습은
이제는 오래전에 사라진 기억의 조각이지만,
어느 날 문득 냄새 하나에 되살아나
가슴 한쪽을 슬쩍 건드리고 지나간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도 그렇다.
늘 배가 고팠던 시절,
70년대 골목에는 번데기 리어카가 유난히 많았다.
번데기는 고기처럼 물을 넣고 끓여서인지
묘하게 국물 냄새가 났다.
용돈이 넉넉할 리 없던 시절,
아버지 구두를 닦고 얻은 동전 하나.
문방구에 갈까 망설이다가
결국 그 동전을 쥐고 번데기 리어카 앞에 섰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동전 하나 쥔 아이들이 줄을 섰고,
신문지를 말아 만든 봉지에 담긴 번데기 한 국자.
그게 그렇게 맛있었다.
아까워서 번데기만 먹고 버리질 못하고
신문지에 밴 국물까지 핥아먹던 기억.
지금 생각해도 그 맛이 생생하다.
겨울이 되면 또 다른 맛이 찾아온다.
무가 가장 맛있어지는 계절.
아삭하고 달고, 끝에 살짝 매운 그 맛.
동네에서 뛰어놀다 배가 고프면
마당 장독대에 올라가
씻지도 않은 손으로 무를 집어 먹곤 했다.
차가운 무가 입안에서 부서지며 퍼지던 그 알싸함.
얼마 전 아내가 김치를 주문했다.
‘다 거기서 거기지’ 하며 시큰둥했는데,
아내가 맛있다며 일부러 내 앞에서 먹는 모습에
못 이기는 척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순간, 어린 시절이 되살아났다.
아삭하고, 매콤하고, 알싸한 그 맛.
그날 아침, 아내가 출근한 뒤
문득 그 무김치가 생각나 라면을 끓였다.
라면은 핑계였다.
사실은 무김치를 제대로 먹고 싶었을 뿐이다.
혼자 있는 집에서
어릴 적 장독대를 뒤지던 것처럼
천천히, 아주 맛있게 먹었다.
저녁에 돌아온 아내가
“라면 먹었어?” 하고 핀잔을 줘도 괜찮았다.
무김치를 맛있게 먹었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그날, 나는 하나의 맛을 통해
내 인생의 한 조각을 다시 만났다.
음식은 그렇게
우리 삶의 가장 조용한 기억을
슬며시 되돌려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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