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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아 Sep 21. 2022

아버지와 아들

 엄마는 아이를 낳으려고 온 힘을 다하고 있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까지 엄마는 온 힘을 다하고 아버지와 가족들이 두 손을 모으고 있다. 

드디어 작고 꼬물 거리는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힘든 순간을 이기고 태어난 아이는 온 가족의 축복을 받고 있다. 

꼬물거리는 입모양을 보고 엄마는 기쁨과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딸과 아들이라는 성별을 떠나 아버지는 자신을 닮은 아이를 보며 감격하고 눈가에 촉촉이 젖은 눈물을 닦아낸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일은 참 경이로운 일이다.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자기와 어딘가 닮은 작은 아이가 꼬물거리는 모습에 눈물이 절로 난다. 

예전에는 딸이 아들보다 조금 섭섭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오히려 아들보다는 딸이 태어나면 더 좋다고 하는 시절이니 아들이 태어나는 일을 예전처럼 크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물론 소중한 생명의 탄생에 딸과 아들의 구분이 있을 수는 절대 없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라고 불리던 시절만 해도 첫 아이는 아들이었으면 했다. 

특히 당사지인 부모보다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유독 아들 손자를 선호하였다. 가문을 이어나간다는 가부장적 사회였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이 많이 사라진 듯하다. 


아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4,5십 년 전까지도 집안에 대를 이을 아들이 있고 없고는 가문의 존망이 달린 문제였다. 

아들은 집안의 대를 잇는 대들보였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씨받이'라는 좀 이상한 풍습도 있지 않았나! 아들을 낳고 대를 잇는다는 생각이 야만? 스러운 풍습을 만들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만큼 집안에서 남자아이에 대한 중요성은 대단했다. 오늘날에 태어난 딸은 예전에 비하면 그야말로 금덩어리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시대가 변하면서 남녀 차별이 점차 사라지는 모습은 퍽 다행스럽다.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한 것이니 딸들이여! 부디 오해하시지 않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렇게 귀하게 생각하던 아들이 아버지와 맞서고 피 흘리는 참사의 흑역사 또한 엄연히 있었다. 

그 역사는 단지 우리나라뿐만이 아니었다. 중국도, 유럽의 나라들도 아들과 아버지의 피 흘리는 참사가 있지 않았던가.

우리의 역사에도 멀리 볼 일도 없다. 

바로 사도세자와 영조의 갈등으로 비극적인 결말을 만든 사건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서로 뜻이 다른 정치세력이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를 갈라놓고 결국에는 세력 간의 알력에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지만 결국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묘한 권력욕이 비극을 일으킨 부분도 있다.

특히 영조는 어머니 신분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왕으로서 자신의 권위가 위협을 받는다고 생각했으며 신하들이 종종 자신을 업신여긴다는 생각에 사로 잡히기도 했다. 영조가 가진 열등감이 정치라는 잔혹한 현실 속에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 어려움이 만든 비극이었다. 

그는 아들에게 정적에게 약점을 보이지 않는 완벽함을 요구하였고 권력을 쥘 때까지 정치적 색채를 드러내어 놓지 않기를 원했지만 역시 아들도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커다란 명분 앞에 아들을 죽여하는 하는 아버지가 되었고 훗날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다고 한다. 

현대에 와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이 조금 다르다. 

권력이나 가부장의 권위로 대립을 하던 과거와는 달리 오늘날은 생활 방식의 문제와 사상과 세대 갈등에서 오는 충돌이 가부장적 권위의 갈등과는 다른 면이다. 

아이가 아직 성인이 되지 않고 공부를 할 나이 때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은 심각하다.

아버지는 밖에서 온 힘을 다해 가족부양이라는 의무를 다한다. 그러나 집에 막상 와 보니 사랑하는 아들은 공부는 하지 않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거나 아니면 밖으로 돌아다닌다든지 혹은 매사에 의욕도 없어 보이고 뭔가 나사 하나 풀린 듯하게 보이면 아버지는 가슴이 답답하다. 

공부를 잘하여 남들에게 자랑을 하고 싶어 하는 아버지와 학과 공부 대신 다른 공부, 음악이나 미술 혹은 체육을 해 보고 싶은 아들과 갈등을 겪는다. 

그 아버지 자신도 자신의 아버지와 겪었던 갈등을 있었지만 그 시절을 망각하고 자신의 아들과 똑같은 일로 갈등을 한다. 겪는다.

모순이다. 

사람의 사주를 보면 태어난 연월일시와 태어난 날의 사주 일간에 영향을 주는 用神은 다르지만 어머니와 딸이 비슷한 인생의 길을 걷고 아버지와 아들이 또한 비슷한 인생의 길을 걷는다. 

늘 궁금한 점이다. 어떻게 모든 오행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먹는 음식에 대한 오행, 성격을 말해 주는 사주가 닮아 있을까! 

사주를 보러 오는 분들 중에 의외로 아들과 아버지의 갈등 때문에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 

부자지간의 갈등 때문에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어머니와 가족은 답답함을 한 번에 쏟아내고 촉촉이 눈가를 적신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햇살이 따뜻하고 겨울답지 않게 바람도 없는 날이라 검둥이 해피를 데리고 산책이나 갈까 하는데 전화벨이 울리고 여자의 나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근에 사는 분이었다. ㅇㅇㅇ씨의 소개로 전화를 한다고 말하고 오늘 찾아볼 수 있냐고 물었다. 

아침에 놓은 주역점에 자손이 여러 개 등장하여 어지럽게 하는 괘였다. 택산함 괘의 구사 효가 동했다. 날이 뱀을 뜻하는 巳日이었다. 亥水 자손 자리가 동하여 兄爻에 생을 받는 듯하지만 月이 丑月이라 土月에 剋을 당하고 日에 충을 당하고 있는 형국이어서 근심거리가 생길까 했더니 자식 문제 때문에 나를 찾아온 사람이었다. 

아주머니 두 분과 키가 크고 비쩍 마른 소년이 차에서 내려 집 마당으로 걸어왔다. 

연신 아이의 등을 토닥거리며 다가서는 두 사람의 얼굴에 검은 먹구름이 끼여 있는 그런 어두움이 가득했다. 

곱상하게 생긴 아이는 얼굴이 맑고 커다란 눈동자 속에는 순수함이 가득 차 있었다.  

다만 주눅이 들어서인지 낯선 환경 탓인지 사람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피하고 그저 먼 산을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의 눈을 피한다는 것은 어딘가 숨기는 일이 있던지 자신이 없던지 아니면 기를 펴고 살지 못하든지 하는 행동이 아닐까! 아무튼 잔뜩 주눅이 들려 매사 자신 없는 모습이었다. 

아이를 앞에 두고 괘를 놓아 보았다. 아버지가 나온다. 

아버지!

사주나 괘를 보지 않아도 경험으로 알 수 있다. 두 여자가 아이를 데리고 왔을 때에는 십중팔구는 아버지와 아들이 사이가 좋지 않다. 

아이는 자리에 앉아 있어도 주변을 두리번거리거나 바닥만 쳐다보고 있다. 어머니와 옆에 앉은 여자가 아이를 바르게 앉히려고 하지만 아이는 소용이 없다. 손톱을 깨물고 의자 앉아서도 금방 일어날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어머니와 함께 온 여인은 계면쩍고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려고 얼른 본론을 말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주역 점을 친 이야기로 말을 시작했다. 아버지가 괘에서 나오니 집안 가장과 아들이 문제가 있냐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들은 아이와 아버지의 생년월일시를 내어 놓았다. 

이런!

아버지의 사주에 자신의 태어난 날을 극하는 불의 기운이 없었다. 늦은 가을 금의 기운이 왕성한 오행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 누구도 아버지를 이길 사람은 없었다. 

아버지가 사업을 하느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대답을 한다. 자신의 태어난 날을 극하는 기운이 없는 사주는 직장 생활을 하기 어렵다. 대부분 사업을 하거나 기술자인 경우가 많다. 

아들의 사주는 그야말로 여름에 토의 사주를 가지고 태아난 혈기 왕성한 사주였다. 땅 속에는 열매가 가득하고 식복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 었다. 아버지를 상징하는 오행 水가 있지만 약하다.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혼자 독립해서 살 팔자다. 아이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독립해야 한다. 

사주는 혈기 왕성하지만 아이는 그야말로 기가 죽고 모든 것에 의욕이 없다. 

어머니의 사주를 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조금 꺼려하며 자신의 사주를 내민다. 가을에 태어난 나무의 사주다. 다행히 오행에 불과 흙의 기운이 적절히 있어 어머니의 복으로 남편 일이 잘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옆에 있는 여자가 한 수 거든다. 

다른 곳에 물어보면 다 오빠가 언니 덕에 산다고 하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고 한다. 

'어지간히 보러 다니는 사람들이다'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가 좋지 않다. 두 사람의 사주가 잘 말해 주고 있다.

자수성가한 아버지는 아들에게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공부를 해서 법대나 의대를 가기를 원했다. 

법대와 의대만이  전부인 줄 아는 사람이다. 아버지의 초년운이 좋지 않아 아버지는 공부를 많이 하지 못했다. 자신의 한을 아들에게 풀려고 하는 전형적인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아이는 그런 법대니 의대니 하는 것은 관심이 없었다.

사주에 예인의 자질이 보였다. 물으니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한다. 

특히 만화를 잘 그려 곧 잘 친구들에게 자신이 그린 만화를 돌려 보기도 한다고 말을 덧붙여 주었다. 

이를 어쩐다. 아이가 기고 싶은 길과 아버지의 아들에게 거는 꿈은 완전히 달랐다. 

생년월일시로 본 아이의 길은 예술가나 혹은 거기에 맞는 공부를 해서 선생님이 되면 딱 알 맞았다. 

같이 온 여자는 고모였다. 그래도 큰 오빠의 맏이이자 친정집 대들보인 오빠의 외아들인데 무슨 방법이 없는가 해서 같이 온 것이다. 집은 아들과 아버지의 갈등 때문에 힘든 상황이었다. 

고등학생 정도가 되면 아버지와 아들 간의 사이가 소원해진다. 가끔 다투기도 하지만 이 아들은 마음이 약해 속으로만 끙끙 앓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며칠에 한 번 집이 발칵 뒤집어진다. 참 난감한 일이었다. 

무슨 방법이 있을까? 고민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다. 아이 어머니와 고모가 아버지를 잘 설득해야 한다고 하는 말 밖에는 나도 달리 할 말이 없다. 

사주에서 나오는 아버지의 성격이 그의 고집을 아무도 꺽지는 못할 것이다. 

자수성가한 집의 가장들이 가지는 특징 중에 하나는 자신의 삶의 방식이 절대 옳다고 하는 데 있다. 자신이 그렇게 해서 살았고 성공을 했기 때문이다. 

아이는 우리가 하는 이야기에는 별 관심이 없는 모습이었다. 

나는 아이가 관심 있어하는 만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도 곧 있으면 환갑이 되어가는 나이지만 만화를 무척 좋아한다. 특히 만화영화는 좋아하는 어린 또래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하니 아이 얼굴이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아이는 이야기를 하는 동안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제야 자신을 이해주는 사람이라 생각하니 나의 눈을 바라보고 자신의 꿈을 키워보려는 의지가 보였다. 다행이다. 

아이 사주는 20대 후반까지는 방황의 시기였다. 

천천히 한 걸음씩 나가라고 말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곁으로 다가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라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달리 무슨 방법이 있을까!

아이는 거기서는 자신이 없어 보였다. 나는 하는 시늉이라도 해 보라고 이야기했다. 아이는 고개만 끄덕였다.

아이가 사주를 믿던 믿지 않던 자신의 길이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차근차근 이야기해 주었다. 

사주는 사실 좋았다. 

다만 아버지와 갈등이 진로를 정하는데 힘든 때이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하려면 때로는 연기도 필요하다고 말해 주었다. 그 말에 아이 왜 웃었는지는 몰라도 갑자기 '씩'하고 웃는다. 

어머니와 고모는 나와 아이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좀 전 보다 얼굴이 환해졌다.  

소심 아이의 생기 잃었던 얼굴빛이 환해지고 초점을 잃었던 눈빛은 잔잔한 호숫가에 비치는 햇살처럼 반짝이듯 빛나기 시작했으니 바라보던 엄마와 고모의 마음도 편안해졌다.

자신의 삶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사주를 통해 이야기를 듣고 아이의 얼굴에도 강한 의지가 보였다. 

그리고 아이의 얼굴을 보면서,

'이 집에 큰 태풍이 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은 자신의 진로를 강하게 아버지에게 주장할 것이 때문이다.

최소한 아이의 의견이 존중되는 방향으로 가겠다는 느낌이 강하게 밀고 들어왔다. 

아이 사주가 20대 후반터 길이 열린다는 말에 힘을 얻었는지 어머니와 고모는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뒤돌아 간다. 

아이는 내가 하는 말에 큰 결심을 하고 장래의 나갈 길을 정했던 반면, 어머니와 고모에게는 해답이 될 수 없었다.  만화니 그림이니 예술이니 하는 적성이 썩 마음에 드는 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아이가 하고 싶은 적성이니 수긍을 했다.

아버지의 고집이 강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아이에 대해 기대를 크게 가지고 있었다. 아이를 통해 대리 만족하겠다는 자체가 아이를 힘들게 했다. 난 그의 아버지가 너무나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랬다면 자신이 청춘을 불살라 열심히 하고 싶은 공부를 했어야 했다. 아이를 망치고 있었다. 뒤를 돌아가는 아이는 내게 올 때와 딴판이었다. 눈빛은 힘이 있었고 걸음걸이는 힘찼다. 자신감이 충만했다.

 다문 입술에서 아이가 자신의 뜻과 포부를 위해 힘을 낼 듯보였다. 아이 혼자만의 자신감을 가지고 가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아이는 뒤 돌아 연신 고개를 숙이고 나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생각이 많은 아이였다. 

감성이 풍부한 아이였다. 

잘 견디고 열심히 해서 꼭 성공할 아이였다. 


한 달이 지났을까? 

그의 고모가 자신의 아이들의 장래와 적성을 보고 싶어 왔다가 그 집의 소식을 전했다. 

그날 저녁도 여느 때처럼 아들을 윽박지르던 아버지는 뜻밖의 아들의 반항에 적잖게 놀랐고 어머니도 놀랐던 모양이다. 

아이는 아버지에게 당당하게 자신의 장래를 이야기했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실망하여 그날 약간의 충돌이 있었지만 아버지는 그 아들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학교 공부를 함께 하면서 따로 미술 공부를 같이 하고 있다고 말을 전했다.  

아이는 전보다는 훨씬 생기 있게 지내고 있고 밥도 잘 먹어서 그런지 삐쩍 마른 몸에 보고 좋게 살이 올라 얼굴도 몰라보게 생기 있게 보인다며 고맙다고 했다. 

부모가 자식에게 바라는 모습과 자식이 가고 싶어 하는 길이 다를 수 있다.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는 순간 집안에 불화가 생기기도 한다. 

자식은 자식의 인생이 있다. 

자식이 고통받지 않고 힘들지 않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은 어느 부모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비록 아이의 길이 가시밭길을 간다 해도 그 길에서 자신이 성취하고 길을 찾아간다면 그저 이겨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격려해주어야 한다. 

자식은 부모의 아바타가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 아이는 미래의 좋은 작가가 되어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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