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리아 Aug 18. 2022

사주를 바꿀까?

 사람 사는 세상 속에는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고 모든 이의 삶은 한 편의 드라마 같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각자의 삶을 떠 받치는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다들 각자의 무게를 지고 걸어가는 인생살이다. 

인생이란 햇살이 밝게 비쳐오는 5월의 어느 봄날 같이 따스하기도 하고 뼛속까지 시리는 찬바람이 불어오는 삭풍의 12월 겨울밤 같은 날도 있다.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리고 남겨 두지 않는 8월 말 9월 초에 불어오는 태풍의 계절 앞에 서 있는 날도 있다.

얼굴 생김새가 다르 듯이 살아가는 모습들이 모두 다르다. 같은 형제라도 인생을 걸어가는 모습은 각양각색이다.

"다 팔자소관이야!" "사주팔자는 못 속인다!"라며 고통 속에 빠진 한 인생에게 핑곗거리를 준다. 운명대로 살아야 한다는 뜻일까?

사주팔자가 대관절 무엇일까? 그럼, 이렇게 힘든 인생이 사주 때문이라면 이놈의 팔자 어디 한 번 고쳐 볼 수 없을까?

결론을 먼저 말한다면 팔자는 고칠 수 없다. 어떤 비용을 지불해도  팔자는 바꿀 수 없다.

사주는 살아가는 계절과 시간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간을 거스를 수 없다.

사주를 믿지 않는 사람이나 믿는 사람이나 팔자라는 말을 무심히 쓴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사람의 운명이란 어떤 틀 속에 갇혀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래서 사주는 절대로 고칠 수 없다고 말하지만 고쳐질 수도 있다. 동전의 양면 같은 상반된 이야기가 사람들을 의아하게 말들 수 있지만 마음먹기에 따라 사주는 얼마든지 바뀐다. 

팔자라는 게 좋은 팔자가 있고 나쁜 팔자가 있다고 한다. 

어떤 팔자가 좋은 팔자일까?

순풍에 돛 단 듯 술술  흘러가는 그런 팔자를 좋은 팔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돈이 많은 재력과 권력이 있는 사주를 좋은 사주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부러워하고 누구나 자식들에게 저런 직업을 가져라 하고 말하는 직업이 있다. 

'사'자가 끝에 붙는 직업을 바라보고 대상으로 삼는 사람이 많다. 그 사람들 과연 행복할까?

어쩌다 보니 '사'자를 붙인 직업을 가진 친구들이 조금 있다. 

선선한 가을 하늘과 살랑거리는 바람이 사람들을 밖으로 유혹하는 그런 날이었다. 하늘은 너무나도 맑고 푸르다. 그 푸르름에 손을 뻗으면 금세 손이 파랗게 물들어 버릴 것 같다.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에 가로수 가지들이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흔들 춤을 춘다. 

가을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그런 날에 남자의 마음도 같이 흔들릴까?

전화가 왔다. 

시내에서 병원을 개업한 친구다. 가끔 날 좋은 날 전화가 온다. 점심 먹자고

조금 이른 시간에 병원 대기실로 들어섰다. 점심시간을 앞두고 있어도 가을의 변화무쌍한 날씨에 감기 환자가 여럿이 대기실에 앉아 있다. 

진료실에 마지막 환자가 앉아 친구의 설명을 열심히 듣고 있다. 잠시 뒤에 인사를 꾸벅하고 나오는 환자를 마지막으로 오전 진료가 끝난 모양이다. 가운을 벗고 겉 옷을 걸치고 나온다. 

확실히 하얀 얼굴에 안경을 쓰고 얼굴에 나 공부 잘했음 하고 쓰여 있다. 

그의 병원은 시내에 위치하고 있어 환자들이 꽤 찾는 편이다. 덕분에 시내에 있는 맛집을 다닐 수 있지만 그의 시간은 1 시간뿐이다.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밥을 먹는다. 밥을 먹으며 친구의 한 숨소리가 땅 꺼지겠다. 

"아이고 이 친구야! 땅 꺼지겠다. 밥 먹다 말고 무슨 한 숨이 그리 깊어? 뭐 고민 있어?"

친구 녀석이 나보고 낮 술 한잔 하려나 묻는다. 자기는 오후 진료를 봐야 하니 할 일 없어 보이는 나에게 술 한잔 하라 권한다. 뭔가 단단히 막힌 모양이었다. 

사주를 공부했으니 내가 무슨 고민이 있는지 알아맞혀 보란다. 

나는 

"글쎄?"라고 말하며 이야기해 보라고 재촉한다. 

의대를 들어갈 때, 그리고 결혼할 때 그 친구는 세상을 다 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단다. 

그런데 지금은 겨우 한 두 평 짜리 방에서 핏기 없는 아픈 사람들만 하루 종일 바라보는 게 얼마나 고역인지를 말한다. 히포크라테스의 신성한 선서는 이미 잊은 지 오래다.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 7시, 8시까지 아픈 사람만 보고 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도 편하게 너의 머릿속에 있는 지식으로 돈을 벌어먹고 살지 않느냐 하며 위로한다. 친구의 마음은 그런 게 아니다. 오늘 같은 날 청명한 하늘을 겨우 한 시간 정도 보는 게 전부인 게 너무 싫다고 한다. 

얼핏 '배부른 소리 하네' 하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몸이 아픈 사람만 하루 종일 보는 것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때가 언제인지 모를 정도로 지겹다는 말을 하는 친구에게, 아픈 사람을 치료해 주는 성스러운 직업이지 얼마나 좋냐고 말하니 친구가 하는 말이

"야! 너도 알지만 공부 좀 하면 의대 아니면 법대 아니니? 뭐 어마어마한 신념이 있는 줄 아니! 돈 벌고 싶고 권력 손으로 만지작 거리고 싶어 그런 거지!"

라고 강한 어조로 말한다. 나는 쓴 소주를 한 잔 마시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틀린 소리는 아니니까!

친구의 사주는 초년에 공부 줄이 있는 사주다. 지신을 도와주는 오행의 힘을 가지고 있으니 얼마 좋은가. 그리고 사주에 의사가 될 수 있는 기운을 타고났다. 다만 재물 운이 약하다는 흠이 있었다. 

의사가 돈 많이 벌지 않느냐고 하지만 돈 벌면 뭐해 쓸 시간이 없다. 마누라 자식 좋은 일만 한다. 

전공한 과의 특성상 하루라도 병원 문을 열지 않으면 경쟁 병원에 환자를 빼앗긴다. 

어떻게 설명할까 그래도 좋은 사주일까? 뭐 의사인데 좋은 사주라고 말한다면 할 말 없다. 

그러나 어쩐 점에서 자신은 찰리 채플린이 주연한 모던 타임스의 주인공과 같을 수도 있다. 어떤 일탈도 그리고 자신만을 위한 그 무엇도 하기 힘들다. 

그런데 좋은 사주라고 말할 수 있을까?

좋은 사주를 타고났지만 친구는 행복하지 않았다. 아마 오늘도 집과 자신의 병원을 왔다 갔다 하는 무미건조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옛말에 천석꾼 천 가지 걱정이 있고 만석꾼 만 가지 걱정이 있다고 했다. 

아무리 돈이 많고 힘이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걱정 없고 근 심 없는 사람이 없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권력을 가지고 재력을 가진 사람들은 정말 행복하게 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일상이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부러워한다. 

다 제눈에 안경이고 그림의 떡이다. 

아무리 하늘의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는 권력도 어느 순간 기울어 가는 모습을 우리는 뉴스를 통해 본다. 

세상에 영원한 것도 없고 무한 것도 없다. 

내가 살고 있는 이웃에 노부부가 있다. 그들은 배운 것 없고 그저 농사를 짓는 일로 평생을 살았다. 

오늘도 새벽부터 경운기 소리가 요란하다. 해 뜨면 나가고 해지면 그 요란한 시끄럽게 덜덜거리는 경운기를 몰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들이 먹는 저녁은 박하다. 어느 날 그 노부부의 저녁에 같이 숟가락 하나 얹었다. 구수한 된장찌개에 두부를 썰어 놓고 잘 익은 김치와 호박전 하나가 전부인 아주 간소한 반찬이었다. 

맛은?

어느 유명 음식점의 산해진미 같은 진수성찬 부럽지 않은 맛이었다. 

거기에 어르신은 막걸리보다는 맥주에 소주를 조금 채워 섞어 드신다. 그리고 나도 어른과 함께 한 잔 쭉! 

그렇게 마시는 술맛은 그랜 모렌지나 매켈란 위스키의 맛에 비교 불가한 맛을 내었다. 

주는 것에 감사하고 최선을 다해 살고 게셨다. 초가집을 허물고 화려하지 않지만 작고 아담한 예쁜 집을 지어 두 분이 오손 도손 사시는 모습을 보고 참삶이란 뭔가, 달콤한 인생이란 뭔가를 생각하게 했다. 

마음속에 행복과 불행이 있을 뿐이다. 


사주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자기 스스로 삶의 생각을 바꾸는 일이다. 나의 끝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주어지는 것에 감사하며 살 수 있는 마음만이 있다면 사주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마음도 어느새 좋은 사주로 바뀌어 있다. 

유리잔에 물이 반이 들어 있다. 어떤 이는 물이 반 밖에 없다고 말을 하고 어떤 이는 물이 반이나 있네 하는 이도 있다. 

반이 적다는 사람 반이 적당하다는 사람이다. 적다고 말하는 사람이 가지는 욕심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하나를 가지면 또 하나를 가지고 싶고 그렇게 하다 보면 삶에 만족이란 없다. 

경험했던 이야기 한 가지 해보겠다. 

봄 가뭄이 심해 건조해진 날씨에 시원한 비 한 줄기가 간절한 어느 날 아침, 

이슬에 젖어 수줍게 내밀려는 노란 민들레 같은 느낌의 여인이 찾아왔다. 

이제 40대 초반의 나이에 겉으로 보는 외모는 뭐 하나 빠지지 않는 여자였다. 

외모는 한눈에 반할 정도로 예뻤고 늘씬한 몸매에 재력을 과시하는 고급 승용차를 타고, 알고 보니 소위 말하는 명문 E여대를 졸업했으니 정말 남이 부러워할 정도의 여자였다. 

아주 예의 바르고 고운 자태로 앉아 내어 주는 차를 조용히 마시던 여자는 파트너의 사주라며 사주를 내밀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빤히 쳐다본다. 

느낌에 나를 시험하는 듯했다. 자기는 말하기 싫으니 네가 다 이야기해 보라는 듯한, 조금 전까지의 민들레 꽃의 모습이 연상되던 여인의 얼굴은 거만한 인상으로 바뀌고 눈을 아래위로 올려다 내렸다 하며 사람 무시하 듯 쳐다보고 있었다.

사주를 풀어 보았다.

사회적 성공과 부 모두를 다 가졌다. 하지만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남자와 살 수 없으며 가정을 만들 수 없는 사주였다. 남자와 자식이 없는 사주였다. 

아이고 뭐 이런 사주가.....

그녀의 얼굴이 조금 거북하고 짜증이 나는 모습이었다.

또 다른 사주를 하나 내놓았다. 역시 말이 없었다. 

사주는 극히 평범했다. 남편과 지식이 잘 되는 사주이다. 그러나 그 사주의 주인공은 안채의 방에서 호롱 불 밝히며 바느질하는 사주였다. 자신은 존재할 수 없는 그런 사주였다. 

여인의 얼굴은 금세 어두워졌다. 

어떤 분들이냐고 묻고 왜 이들을 보는지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러나 이야기는 하지 않고 두 번째로 내놓은 사주에 대해서 또 묻고 또 묻고 할 뿐이었다. 

여자는 거짓말을 한다는 사실을 괘를 통해 알고 있었다. 

그녀의 본래 사주는 처음 것이 맞았다. 파트너 사주라고 내밀었던 사주가 자기 사주였다. 

꽤 성공한 직위에 앉아 있고 남부러울 게 없지만 그녀는 아직 미혼이었다. 괘로 봐서는 남자가 없는 사람으로 나왔다. 

자기 사주이니 파트너의 사주보다 더 많이 묻는 게 당연하지만 그 여자의 사주가 아니었다.

이제 사주를 속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의 기세가 맨 처음 나를 봤을 때 모습으로 돌아왔다. 

크고 이지적인 눈이 순간 번쩍이더니 이 사주가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어떻게 알았냐고 묻는다. 

오는 시간으로 괘를 만들어 오신 분의 문제를 대충 알고 사주를 봤다고 이야기했다. 

그녀는 자신은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없냐고 물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시 되 물었다. 어떤 남자가 좋은 남자라고 생각하느냐고?

현실에 딱 떨어지는 이야기를 한다. 얼굴이야 평범해도 키가 큰 남자면 좋겠다고 했다. 좋지! 키 크고 훤칠한 남자 정말 좋아!

어떤 일을 하는 남자면 좋겠느냐고 한다. 적어도 어디에 데려가도 내세울 수 있는 직장이나 직업이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물론 그녀도 직업은 훌륭하다. 변호사가 직업이니 일등 신붓감이라고 말해야 하나? 

거기에 남자의 가정환경이 막내였으면 좋겠다는 말을 덧붙인다. 

'음~ 좋아! 아주 좋아!'

예전에 어느 노래 가사에서 처럼

"그런 남자에게 너무 잘 어울리는 그런 여자가 좋더라" 하는 가사가 생각나게 한다. 

나는 그녀에 사랑을 생각해보셨나요? 하고 물었다. 그녀는 피식 웃는다.

오히려 그녀는 나를 보고 사랑을 믿느냐고 반문한다. 나는 믿는다고 했다. 나이가 들어서도 사랑의 감정은 살아 있고 살아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녀가 바라보는 세상에 아름다움은 없었다. 그저 현실의 저급함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왜 자기 사주 아닌 사주를 내밀었느냐고 하니 답은 대단히 놀라운 말이었다. 

많은 돈을 주고 사주를 바꾸었다는 말을 했다. 그래서 지금은 이 날짜를 자신의 생일로 생각하고  살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녀의 그런 말이 놀라웠고 참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남자를 만나는 사주는 그녀가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사주였다. 그저 그 남편을 위해 자기희생을 하는 그런 사주일 뿐이었다. 

어떤 삶이 좋은지에 대해서는 자신의 몫이라고 말해 주었다. 아무리 그렇게 바뀐 사주팔자를 들고 생일을 해 먹어도 태어난 본래의 기운에는 전혀 변함이 없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여 주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원하는 것을 전부 가질 수 없다.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내놓아야 한다. 

사주는 공평하다. 돈 많고 남부럽지 않은 사람들을 우리는 부러워하고 동경한다. 

그러나 그들도 말 못 할 삶의 고통과 아픔이 있다. 바람결에 풍문으로 들려오는 유명인의 고통과 비극이 있다.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지고 싶어 한다.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많은 것을 가질 수 없다. 

무엇이 자기에게 소중한지 정하는 순서는 자신의 몫이다. 

그 뒤 신은 보상과 벌을 함께 휘두른다. 당근과 채찍을 함께 사용한다. 

나를 찾아왔던 그 여자가 바꾸었다는 사주에는 그녀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는 성공한 삶을 살고 있고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일도 겪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녀에게는 남자가 그녀에 주어지지 않을 뿐이다. 그녀의 지금 삶과 남자를 바꾸자고 그녀에게 속삭이는 메피스토펠레스(괴테의 파우스트에서 괴테를 유혹하는 자)의 말에 그녀는 어떤 결정을 할까?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도 순간순간 행복이 찾아들고 그 작은 행복에 감사하고 산다. 

절대로 다른 이들이 가지지 못하는 행복과 웃음을 쥐고 하루하루를 남모를 고통 속에 사는 삶도 살아가기는 마찬가지다.  

마음이다. 내가 원하는 행복이 꼭 눈에 붙잡히는 것만이 행복은 아니다. 시골에서 비록 아침부터 저녁까지 몸을 움직이는 고단한 삶일지라도 만족하고 행복해한다면 그처럼 좋은 사주가 어디 있을까?

돌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에 커다란 짐을 지고 가는 듯한 발걸음이 보인다. 언제 저 짐을 벗어 놓을까!




작가의 이전글 달콤한 실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