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절주절 음악 08
「Champagne Supernova」(Oasis) : https://youtu.be/NcUhYQQrvyI
말린 고추와 오아시스
한여름, 볕에 고추를 말리는 모습을 보신 적이 있으실지 모르겠다. 공들일 것도 없이 넓은 돗자리나 소쿠리 위에 고추를 대강 흩어 놓고 햇볕 드는 곳에 내어 둔 그 모습 말이다. 이제는 마당 딸린 집이 흔치 않아서인지 요사이 길을 거닐다 보면 상가 입구, 입간판 위, 비상계단 창문 앞, 정말 온갖 장소에서 말라가는 고추를 볼 수 있다. 이렇게 길바닥에 대뜸 농작물이 널려있는 것이 그리 흔한 풍경은 아닐 텐데, 놀라울 만큼 아무도 그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 가끔 신기하게도 느껴진다. 예기치 못하게 고추를 마주쳐도 사람들은 '고추 말리네.'하고 지나갈 뿐이다. 거리의 자전거만 종적을 감추는 나라답게 말리던 고추를 도난당했다는 소식도 들어본 적이 없다.
누가 들으면 개탄할 소리겠지만, 나는 「Champagne Supernova」를 들으면 고추를 말리는 모습이 생각난다. 좀 더 적나라한 감상을 말하자면 소쿠리 위에서 말라가는 고추의 시점에서 부르는 노래 같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존재가 되어서, 내가 어디에 널려 있는지도 모른 채 기울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마냥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는 무언가가 노래하는 듯한 느낌. 혹은 그런 망상을 하면서 찌든 현실을 간신히 살아내고 있는 사람의 머릿속을 뚫고 지나가는 기분이 든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그러게요. 아마 오아시스가 이걸 봤다면 뭔 소리냐면서 온갖 욕지거리를 했겠지.
생각해보면 오아시스의 몇몇 노래를 들을 때 항상 겪는 과정이지 싶다. 「Don't look back in anger」도, 「Champagne Supernova」도 연속된 의미가 없는 가사이다 보니 주로 이미지로 노래를 사유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어떻게 이미지화하느냐는 순전히 받아들이는 사람에 달려 있다. 각자의 경험과 감각에 의존하여 노래를 이미지화하다 보니 브릿팝을 말린 고추로 받아들이는 구수한 결과가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다른 사람들과 노래에 대해 이야기해보면 각자가 떠올린 이미지나 사고가 어느 정도의 일관성을 가져서 서로의 설명에 '맞아, 맞아' 하고 공감하게 된다는 점이 또 재밌다.
그런가 하면 가사가 감상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느냐, 즉 'Champagne'과 'Supernova'가 아닌 임의의 영단어들의 조합이었다고 한들 지금과 동일한 감상을 가지게 되었을까. 상상해보자면 그렇지도 않을 것 같다. 무의미한 가사라고들 얘기하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일정한 의미를 만드는 것이다. 오아시스의 노래는 분명 대중적이지만, 노래의 대중성을 넘어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노래에 열광하며 두서없는 가사를 열성적으로 따라 부르게 되는 데에는 이런 오묘한 요소들이 매력으로 작용하는 듯하다. 나 역시도 그 매력에 흠뻑 빠져 말린 고추가 부르는 이 노래를 수도 없이 듣고 있다.
Where were you while we're getting high?
여름이 끝나간다기엔 아직 이른 것 같지만, 적어도 끝에 가까워지고는 있는 듯하다. 에어컨 발명가에게 하루 세 번 머리를 조아리며 지내야 했던 맹렬한 더위가 물러가고 이제는 한낮을 빼면 선선하다고도 말할 수 있을 정도의 날씨가 되었으니. 이렇게 무언가의 끝을 앞두게 되면 의례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뭐 했다고. 뭐 했다고 벌써. 이번 여름도 어김없이 그렇다. 뭐 했다고 벌써 8월 중순이지. 뭐 했다고 벌써 개강할 때가 됐지. 원대한 업적이나 성취가 있다고 방학이 되감기는 게 아님에도 우리는 흘려보낸 시간의 핑계를 애써 찾게 된다.
이는 우리가 시간의 값어치를 얼마나 높게 잡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시간은 금이며,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가진 원석이며,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질료이다. 더구나 시간은 유한하다. 모두가 같은 분량의 시간을 가지고 있지는 않더라도 각자가 가진 시간이 언젠가 동이 난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이제는 지긋지긋도 한 '자원의 희소성' 덕택에 시간의 가치는 더욱 뛰어오른다. 허투루 시간을 보내는 건 이제는 죄악에 가깝다.
얼핏 보면 시간은 만인에게 공평을 담보하는 유일한 자본 같기도 하다. 하루는 누구에게나 24시간이고, 누구든 5분짜리 노래를 듣는 데에는 5분을 써야 한다. 그러나 썩 그렇지도 않은 건 주어진 시간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것이 또 다른 특권이기 때문이다. 생각지도 못한 일을 할 때 으레 시간을 빼앗긴다고들 얘기하지만, 누군가의 시간은 늘 무언가에 빼앗기다 못해 아주 예속되어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원하는 일에 원하는 만큼 시간을 쏟을 수 있는 건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 할 필요가 없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Champagne Supernova」를 듣다 보면 마치 노래하는 이들이 무한한 시간을 가진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우리가 (약에) 취해 있는 동안 어디에들 가 있었냐고 묻는 그들의 태도는 당당하다. 당당하게 그들은 시간을 허비한다. 아니, 그들은 취해있음으로 시간을 철저히 해체한다. 애초에 관념에 불과한 시간은 그것을 포착할 수 있는 그 어떤 실마리도 남기지 못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전락한다. 그래서 「Champagne Supernova」가 가끔은 저항의 노래처럼 들리기도 한다. 무위(無爲)가 만드는 가장 맹렬한 저항. 그것을 지금 무료로 관측할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감사할 따름이다.
무엇보다 이 노래의 가장 신경 쓰이는 점은 'Supernova'의 발음이겠다. 'Supernova'가 어말에 올 때는 제대로 발음하면서 어중에 올 때, 즉 뒤에 'in the sky'가 따라오는 부분에서는 'r' 발음을 넣어서 'Supernovar'처럼 발음을 한다. 그래서 처음 들을 때 제목에 떡하니 적혀있음에도 'Supernova'의 스펠링을 다시금 확인하게 됐다는 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