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절주절 음악 07
「계절의 끝에서」(페퍼톤스) : https://youtu.be/UjfKsCu41Co
어릴 땐 꼭 어줍잖게 어른스러운 척을 하고 다녔다. 무슨 논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시의 나는 비관과 냉소가 어른의 전유물이자 상징인 양 생각했다. 그래서 좋아도 시큰둥, 들떠도 애써 얌전한 척. (모친께서는 뭘 먹여도 '먹을 만하네'하고 마는 내가 몹시 얄미웠다고 한다) 감정을 절제하는 내가 어른 같다고 생각했나보다. 그것이 절제(節制)가 아니라 절제(切除)였는지, 꽤나 머리가 크고도 나는 양껏 좋아하는 일에 여전히 서툴렀다. 좋아하는 대상이 아주 없었던 게 아니다. 다만 아이돌에, 해외축구에, 신앙에, 무엇인가에 대해 하루 종일도 떠들 수 있을 것처럼, 주체하지 못 할 만큼 열을 올리는 친구들을 보며 '그럴 정돈가?'라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을 뿐이다.
뭐든 그랬다. 취향도 있고 호오도 있었지만 무언가에 대한 선호가 열정이 되지는 못했다. 깊이도, 구체성도 없이 뭉뚱그려 '밴드 음악', '야구', '문학' 등을 좋아했을 뿐이었다. 소위 '앓는다'는 감정은 이해는 하되 공감하기는 어려웠다. 대학에 와서는 무언가에 열정을 쏟아가며 사랑하는 일도 노력이요 능력의 범주라는 걸 깨달았다. 왜 나는 그것들을 좋아하는지, 무엇이 나를 설레고 기쁘게 하는지, 온 마음을 다 해 무언가를 좋아하는 것은 스스로를 이해하는 과정이자 결과였다. 그동안의 나는 내키는 것과, 덜 내키는 것이 있었을 뿐 무엇을 좋아한다고 말하기 민망한 채였던 것이다.
처음으로 자신 있게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된 대상이 페퍼톤스와 그들의 음악이다. 처음엔 우연하게, 몇 번 듣다보니 좋아서, 결정적으로는 난생 처음 가본 페스티벌에서 홀딱 빠져서, 나중에는 플레이리스트에 앨범을 통으로 넣어놓고 반복하면서 라이브 영상과 이들이 출연한 예능 클립을 찾아 헤매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을 온전히 좋아한다고 생각할수록 그 이유를 언어화하기는 힘들어 지는 것 같다. 어느 것부터 말해야 할지, 어느 것을 특히 강조해야 할지, 우습게도 들리겠지만 이 고민에는 일종의 비장함까지도 따른다.
그래서 왜 이 사람들이, 이들의 음악이 좋냐면요. 고심 끝에 나는 이 노래를 고르겠다. '흘러가는 시간들을 멈출 수는 없으니 다만 우리 지금 여기서 작은 축제를 열자'로 시작해서, '돌아보면 다시 그곳 다시 빈 손이지만 어렴풋이 즐거웠다면 그걸로 된거야'라는 말로 마치는 이 노래를. 적어도 노래를 듣고 있는 동안에는 습관적인 우울에서 벗어나 나조차도 몰랐던, 내 손에 쥐고 있는 작은 행복을 꺼내어 만끽해주는 이들의 노래를. 나는 열성을 바쳐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감상에 젖는다는 말처럼, 이따금씩 어떤 이유도 촉매도 없이 불쑥 머릿속에서 행복했던 기억들이 그림처럼 펼쳐질 때가 있다. 바로 어제 일처럼 몸짓 하나, 표정 하나 세세하게 떠오르는 기억도 있는가 하면 외물과 배경의 경계도 흐릿한 가운데 당시의 감정이나 대상이 기억보다도 인상에 가까운 형태로 남아 있는 것도 있다. 내내 웃고 떠들다 녹초가 되어 돌아왔던 여행, 술에 취해 주황색 등 아래에서 새벽녘까지 웃고 떠들던 자리, 정갈하게 햇볕이 드는 날 거닐었던 어느 돌담, 2호선 창문 너머로 처음 마주한 한강의 넘실거림. 이게 지금 왜 떠올랐지? 싶지만서도 밀물처럼 쏟아지며 비어있던 마음을 흐붓하게 채워주는 귀중한 기억들.
거기엔 여행, 공연처럼 굵직한 기억들도 있지만, 실은 누구에게 설명하자니 그저 그런 싱거운 이야기 같아 열없어지는 사소한 기억들이 더 많다. 예컨대 중학교 현장학습 날 당산 철교를 지나며 난생 처음으로 본 한강의 풍경에 경도된 기억이나, 언젠가 아버지를 따라 억지로 오른 산 정상에서 원통형 아이스 께-끼를 핥아 먹으며 등에 난 땀을 말리던 기억, 같은 것이다. 언제일지도 모를 평범한 하루에, 언제나와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우연찮게 마주한 사소한 행복. 누구나 있을 법하지만 유독 나에게는 특별하게, 소중하게 각인된 기억들이 있다.
이렇게 떠올리다보니 행복한 기억이 참 많기도 하다. 흔히 행복은 불로초나 세계 정복의 수단이라도 되는 양, 일생을 걸고 여정을 나서서 간신히 구해와야 하는 거창한 것으로 생각되곤 하지만 실은 생각보다 자주, 불쑥 우리를 찾아오기도 하는 것 같다. 잠깐의 숨고름에서, 무심히 돌린 시선에서 우리는 우연찮게 자잘한 행복을 발견하고 남모르게 그를 간직한다. 「계절의 끝에서」의 '작은 축제'라는 것도 이런 게 아닐까. 직접 바짓단을 걷어붙이고 행복을 찾아갈 수는 없어도,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불쑥 불쑥 찾아오는 행복을 놓치지 않고 누리는 것. 그 작은 축제가 끝나고, '돌아보면 다시 그곳, 다시 빈 손이지만', '어렴풋이 즐거웠다면 그걸로 된거야.'
언제든 행복할 준비를 해야겠다. 기껏 찾아온 행복을 쉬이 놓치지 않도록.
결국 지극히 수사적인 문구를 빌려 이들에 대한 연모를 표현하게 되었다. 하지만 최애라는 게 원래 그렇지 않나. 혼자서는 이 세상 있는 주접 없는 주접을 다 떨다가도 막상 떡하니 마주치면 아무 말도 못하고 입만 틀어 막게 되는. 어쩌면 어떤 대상을 정말 좋아하게 되면 그에 대해 한 없이 분석하고 파고들게 되지만서도,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점점 단순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처음에야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내 스스로도 설득해야 하지만, 어느 순간 좋아하는 데 이유는 필요 없어지니까.
보고있지야 않으시겠지만, 장원님 결혼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