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절주절 음악 06, 2021.02.05.
「앵콜요청금지」(브로콜리 너마저) : https://youtu.be/a9MIRA7nt30
기억도 희미한 오래전에 브로콜리 너마저의 이름을 들은 기억이 있다. 관심이 생겼던 건 아니었다. 분명 방송 어디에선가 언급되는 것을 보고 뭐 이름이 저래, 하고 넘어갔던 기억. 대학생이 되어서야 이들의 노래를 처음으로 접했는데, 하필이면 맨 처음 들어본 곡이 골든-힛트 모음집 앨범에 들어있는 「그 모든 진짜 같던 거짓말」, 1분짜리 피아노 버전. 전주가 긴 노래구나 생각할 즈음에 노래가 끝나 있었다.
삼고초려를 거쳐 브로콜리 너마저의 1집을 듣고 비로소 그들을 추종하게 됐다. 앨범 하나를 통째로 플레이리스트에 넣고 종일 반복 재생을 한 것은 처음이지 싶었다. 「춤」도, 「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도, 「보편적인 노래」도, 「유자차」도, 「봄이오면」, 「말」, 「2009년의 우리들」…, 전부 눈물겹게 공감하며 또 지겹게 들었지만 「앵콜요청금지」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나간 날은 모두 뒤로, 나는 이게 되지 않는 사람이다. '누구에게도 미움받지 않는' 것은 학창 시절을 통해 굳어진 나의 편집증적인 집착이니까. 나로 인해 상처 받거나 나에 대해 실망한 사람들이 나를 미워할까 봐 늘 걱정하고 불안해한다. 지금도 인간관계에서의 실수, 내가 다른 이를 상처 입힌 일, 부끄러운 기억을 차곡차곡 쌓아놓고 우울할 때마다 되씹어보곤 한다.
대학교를 다니면서 그런 것들이 잔뜩 쌓였다. 같잖은 핑계는 다 차치하고 나는 미숙했고 미숙한 주제에 넘치는 의욕으로 많은 사람을 상처 입혔다. 어느샌가 시간을 돌리고 싶다는 빤한 공상을 하는 일이 잦아졌다. 테트리스로 치자면, 1스테이지의 아무것도 쌓여있지 않은 처음으로 돌아가서 긴 막대기가 들어갈 오른쪽 한 줄을 빼놓고 찬찬히 다시 쌓아 올리고 싶었다. 완벽하게.
그러다 동아리 활동을 마치고, 광역버스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어떤 날에 「앵콜요청금지」를 처음으로 들었다. 노래를 듣는 내내 북받쳐서 울컥울컥했다. 하필 내 앞사람에서 만석이 되어서 나는 사람이 내릴 일 없는 고속도로 구간을 지나는 동안 버스 하차문 계단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앉아 있던 사람이 봤다면 자리가 없는 게 그렇게 서러웠나 싶었을 게다. 집에 도착하기까지 「앵콜요청금지」를 듣고 또 들었다. 앵콜, 앵콜.
무언가 바뀌진 않았다. 나는 여전히 미숙하고, 여전히도 과거의 실수와 무책임함에 짓눌려 있다. 모두가 날 미워할 것 같다는 생각에 간혹 생각나는 사람들의 안부도 쉬이 묻지 못한다. 그럴수록 그들과 멀어진다는 걸 알면서도, 알면서도 하지 않는 나를 또 혐오하게 되면서도. 적어도 이젠, 내가 쌓아놓은 테트리스는 리셋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긴 막대기가 들어갈 자리가 막혔다면 돌리고 짜 맞춰서 한 줄씩이라도 없애야 한다는 것을.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내가 생각해도 난 피곤하게 사는 사람이다. 그치만 어쩌겠어. 이십 년 넘게 살아도 고쳐지질 않는걸.
「앵콜요청금지」를 비롯한 브로콜리 너마저 1집의 노래들은 각기 다른 이야기를 하는데도 하나 같이 울적하게 따뜻하다. 어떤 노래를 들어도 위로를 받는 기분.
브로콜리 너마저의 1집이 왜 아직도 음원 스트리밍이 지원되지 않는지, 그 이유를 뒤늦게 알았다. 그야말로 「앵콜요청금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