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09.
애써서 듣지 않았던 노래였다. 왜, 그런 노래 있지 않은가. '아, 이 노래를 들었다간 돌이킬 수 없다.', '이 가수가 좋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하는 노래. 이미 「댄스홀」이나 「케세라세라」 같은 노래를 들으며 이름을 익혀놨던 밴드였기 때문에, 더구나 이 노래는 제목만 봐도 내 취향에 꼭 들어맞을 것만 같아서, 이상한 심보지만 애써서 이 노래를 피해왔다. 플레이리스트에서 일본 밴드의 지분율이 지나치게 높아지는 것이 우려되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더는 피할 수 없어 듣게 된 순간, 아니나 다를까.
영상의 댓글을 보면 가사에 대한 칭찬, 감동, 간증이 일색인지라 한동안은 꼭 번역된 가사가 첨부된 영상으로 노래를 들었다. 처음 '키세키' (=기적, =궤적)라는 동음이의어를 활용한 가사를 이해했을 때는 '여기서 대성통곡하면 되는구나' 싶었다가 어느새 마음이 힘들 때마다, 괜스레 찔끔 눈물을 찍어내고 싶을 때 찾아 듣는 노래가 되었다.
'보쿠노 코토'라는 제목이 거 참 거슬리지만 ('나라는 것'이라는 표현이 너무 어색하게 느껴진다…) 참 적절하다 싶은 것이, 이 노래는 '나'라는 존재를 '선언'하는 노래기 때문이다. 나라는 존재의 나약함도, 무력함도, 부족함도, 그럼에도 끊기지 않는 나의 삶도, 가리거나 보태지 않고 있는 그대로 선언하는 것이 이 노래이다.
어쩌면 뜬구름 잡는 이야기 같기도, 나약한 이의 푸념 같기도 한 가사가 무엇보다 위로가 되는 것은 선언에는 긍정과 용인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약하고 무력한 나를 세상에 공표하기 위해서는 '그래, 맞아. 난 그런 사람이야.'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모습은 어떤 직설적인 위로와 응원보다도 더욱 직접적이고 확실한 사례가 되어준다. 아, 이래도 되는 거구나. 이런 나일 수도 있는 거구나.
아직 여름이 완연하지 않았던 어느 주말의 일이다. 더워지기 전에 야외 운동을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나서서는 20분도 안 되어 나가떨어져 공원의 매점에서 음료수를 사서 나오던 순간. 매점의 점원분이 뛰어나와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강아지와 함께 털레털레 떠나고 있는 손님을 애타게 부르는 듯했다. 보아하니 강아지가 만든 배설물을 휙, 가게 쓰레기통에 버리고 간 모양이었다. 어라, 이 정도면 돌아봐야 하는데, 진짜 그냥 가시나. 어라, 이거 나라도 뛰어가서 잡아와야 하는 거 아닌가. 나의 '어라'를 기다려주지 않고 그분은 순식간에 가버렸고 점원 분은 옆에 맹하니 서 있던 나를 얼핏 흘기고는 투덜거리며 들어가 버렸다.
어딘지 선뜩해져서 나는 터덜터덜, 마시다 만 음료수를 라면 국물을 담는 통에 쏟아 버리고는 그 자리를 떴다. '케헥'하는 소리와 함께 심장을 움켜쥔 사람이 허겁지겁 약병을 찾아 삼키는 장면처럼 허겁지겁 이 노래를 틀었다. 번역된 가사를 보고 싶어서 썰렁한 벤치에 자리를 잡고는 멍하니 5분이 넘는 노래를 듣고 읽고 있었다. 발자국, 멋진 날, 사랑, 나, 황홀하기도 한 노랫말의 파편이 얄궂게 뺨을 스쳤다.
가뭄에 콩 나듯 사람들에게 선하다, 친절하다는 평을 들을 때면 나는 손사래를 치며 입꼬리를 아래로 늘어뜨린다. 겸손이라고 보이겠지만 실은 웃음, 아니, 우스움을 참기 위한 행동이다. 나는 나의 선함이 교육의 결과이자 인정욕구의 발현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남이 보지 않는 상황에서도 규범을 지키는 이유는 세계 평화나 도덕적 인식 때문이 아닌 '혹시나 남이 볼까 봐'에 불과한 초라한 사람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칭찬을 들을 때면 티는 안 내려한다마는 나도 모르게 속으로 이죽거리게 되는 것이다. '어이쿠, 완전히 잘못짚으셨네.'
나 자신의 위선을, 그 흉한 꼴과 악취를 누구보다도 또렷하게 느끼면서도 얼추 낯짝은 치켜들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스스로가 부끄러워질 때마다 두통약처럼 훌떡 삼키는 하나의 문구 덕택이다. '그래도 남에게 피해 주는 건 아니잖아.'라는. 유치하고 얄팍하기 짝이 없지만, 나 스스로를 속이기에는 모자람이 없는. 그리고 그날, 오물 투기범을 멍하니 풀어주며 주목받는 방관자가 된 그날은, 차마 그 얄팍한 위안으로 덮을 수 없는 무언가가 올라왔다. 그리 놀랍지는 않은, 그저 잠시 잊고 있었던 것 같은, 나는 이런 사람이었지,라는 체념 섞인 유감이.
군대에선가 받았던 상담에서 해본 문장 완성 검사. '가장 싫어하는 것은 ___다.'라는 빈칸에 나는 겁도 없이 '별로인 사람이 되는 것'을 적었더랬다. 내가 별로라고 생각한 모습을 내가 재현하고 있을 때가 가장 싫다고 자랑스럽게 주석까지 달아보면서. 그 치기가 무색하게도 나는 날이 갈수록 별로인 사람이 되어간다. 무언가에 책임을 질 정도로 성숙하거나 의젓할 수 없어서 그런 일들을 요리조리 피하려다가, 궁지에서 나 자신의 위선을 여과 없이 들이마시게 되는 그런 사람이. 이마저도 '나라는 것'으로 삼아버려도 되는 걸까. 노래를 부른 사람들도 '아 이건 좀.' 하고 선을 긋지는 않을까.
나는 나를 선언할 수 있을 만큼은 떳떳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 누구에게가 아닌, 나 스스로에게 '이쯤 되면 괜찮지 않을까?'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떳떳함은 언제쯤 가질 수 있는 걸까. 어떻게 가질 수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