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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물 Aug 12. 2021

「도망가자」(선우정아)

주절주절 음악 04, 2021.04.28

「도망가자」(선우정아) : https://youtu.be/GOS6C2jXTa8

아무렇지 않게 해주는 것은


'박하'님의 『아무렇지 않으려는 마음』이라는 책을 읽은 기억을 떠올려 본다. 뚜렷이 기억에 남는 일화나 서술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것이 좋았다. 누구나 겪었을 법 하고 누구나 고민할 만한 이야기들, 그리고 누구나 가지고 있는 옹졸하고 미련한 마음을 담백하게 풀어준다는 점에서. 작가가 아무렇지 않'으려'는 사람이어서 좋았다. 전혀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닌 거니까. 그럼에도 아무렇지 않다고 말하려 하니까. 그 소시민적인 발악에 크게 공감할 수 있었다. 


깨나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하루이틀 일인가, 하고 넘기기에는 조금 크고 무거운 우울에 한동안은 말 그대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일상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청소나 설거지를 쉬이 미루게 되고, 수업이 뜬구름처럼 지나갔다. 둘러보면 사람인데 사무치게 고독했다. 우울감을 넘어 고독감을 느껴본 것은 처음인가 싶었다. 사람을 그리워하기야 했지만 혼자됨을 괴로워하지도 않는 사람이었는데.


상담을 시작해보자니 여력과 재력이 없었고, 털어놓을 사람을 찾자니 내 우울을 남에게 옮기고 싶지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다. 지금의 나는 불과 몇 주전의 나보다 건강하다. 더이상 황색 점멸등을 쳐다 보다 말고 대뜸 죽고 싶어하거나 척수 반사 처럼 대상도 청자도 없는 욕을 내뱉지 않는다. 막연한, 막연하지 않던 우울에서 다분히 벗어났다. 사람이 미쳐 돌아서 이젠 우울한 줄도 모르나? 라는 의심을 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이전 만큼 나를 학대하지도, 우울감과 무력감에 푹 잠겨 있지도 않다. 


「도망가자」라는 노래를 열심히 듣게 된 것도 요 사이의 일이었다. 듣는 사람을 상정한,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는 노래였지만 이상하게 나는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내가 떠올랐다. 나는 누군가를 이끌어줄 입장은 못 돼. 그렇다고 누구에게 날 끌고가 달라고 부탁하고 싶지도 않아. 누가 나와 함께 도망쳐줄까. 영화나 드라마의 흔한 클리셰처럼, 팔뚝이 붙들린 채로 목적지도 모르고 마냥 뛰다가 지친 숨을 몰아쉬면서 황당해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서 나는 그저, '나'라는 대답밖에 떠오르질 않는 것이다. 


어제는 시험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기가 싫어져서 오랫동안 마음에만 두고 가보지는 못 했던 식당에서 맥주를 한 잔 마셨다. 오늘은 먼젓번에 주문한 옷이 도착해서 비대면 시험을 보던 와중에 궁금함을 못 이기고 허겁지겁 포장을 뜯어봤다. 식당은 생각보다 평범하고 나름의 규칙들이 까다로웠지만 작은 잔에 거품 없이 가득 따라준 맥주가 달았다. 주문한 옷은 생각보다 아무 데에나 입고 다니기는 어려워 보였지만, 딱 생각한 만큼 예뻤다. 무엇에 홀린 것마냥 고민도 없이 그런 일들을 했다. 언제든 할 수 있었지만 최후순위로 미뤄뒀던 일을.


시간이 해결해주는 것이라 생각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시간은 흐르고, 우울도 후회도 회한도 흐르는 시간에 씻겨가기 마련이라고. 이제와 생각해보면, 우울에 찌들어 있던 나를 건져낸 것은 시간이 아니라 나의 노력이고 발악이었구나 생각이 든다. 우연찮게 발견한 사소한 행복감을 그냥 버리지 않고, 오늘의 할 일을 해치우고 그 자체로 뿌듯해 하고, 규칙적으로 살면서 나를 내버려두지 않으며, 자각도 없이 나는 발악하고 있었고 회복하고 있었구나. 시간은 약이 아니라 결과일 뿐이다. 그리고 나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건, 아무렇지 않으려는 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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