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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eurist Jan 03. 2024

사랑 영화라는 오해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네이밍) 리뷰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모두의 극찬을 받은 로맨스 영화의 걸작, 세계의 찬사를 받은 우리 시대의 로맨스 영화.

두 문장에는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이하 '사누최')를 이해하는 미디어의 관점이 담겨있다. 미디어 외에 다수의 관객들 또한 이 영화를 로맨스 영화로 바라본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랑할 땐'이라는 조건은 영화를 특정 방향으로 이해하도록 관객에게 해석의 틀을 제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롤로그로 시작해 열두 개의 장을 거쳐 에필로그에 이르는 동안 한 가지 의문을 가졌다. '사누최'는 정말 로맨스 영화일까?


영화의 첫 장면, 주인공 율리에는 파티가 한창인 건물의 테라스에서 오슬로의 전경과 건물 안쪽을 번갈아 바라본다. 검은 드레스를 입고 담배를 문 그녀의 표정에는 이유 모를 불안이 서려있다. 모종의 사건을 암시하는 듯한 씬이 마무리된 후, 구성에 대한 짧은 설명 (열두 개의 장,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로 구성됨)과 함께 영화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영화의 프롤로그는 율리에가 여러 학기에 걸쳐 전공을 변경하는 과정을 압축해 보여준다. 육체가 아닌 정신에, 다시 정신이 아닌 시각에 본인의 길이 있다고 판단한 그녀는 의학에서 심리학으로, 심리학에서 사진으로 관심을 옮긴다. 프롤로그에는 이번 영화를 통해 율리에라는 인물의 삶과 성장을 그리겠다는 감독의 예고이자 선언이 담겨있는 듯하다.


영화에서 사랑은 성장과 실패가 반복되는 모든 순간에 물들어 있다. 율리에가 우울에 빠져 허우적댈 때도, 아버지와의 관계를 고민할 때도, 갑작스레 전 남자친구의 소식을 접했을 때도 그녀의 곁에는 언제나 연인이 함께한다. 관객들은 엔딩에 이르러서야 홀로서기에 성공하는 율리에의 모습을 통해 사랑이 곧 그녀의 삶을 지탱하는 뿌리이자 큰 줄기였음을 확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이 영화의 일부일 뿐 전부가 아니다.


'사누최'는 30대에 접어든 한 여성의 성장영화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는 순간에도 율리에는 '정체성 찾기'가 본인의 사명임을 잊지 않는다. 여성을 향한 부당한 대우에 목소리를 내고, 본인의 자아에 대해 고뇌하며, 결핍을 느낄 때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냉철하게 관계를 끊는다. 그럼에도 영화 속 율리에는 표류하는 인물에 가깝다. 본인의 의지에 따라 삶을 개척하는 듯 하지만, 매번 그 결과는 처음 상상했던 모습과 다르다. 전공으로 택한 사진은 어느새 그녀의 삶에서 자취를 감추고, 가끔씩 쓰는 글은 쓰이기만 할 뿐 업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악셀과는 가치관의 차이로 관계를 마무리하고 에이빈드에게는 본인의 결핍을 핑계 삼아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겉도는 그녀는 매 순간 최악의 수를 두는 최악의 인간으로 전락한다.


반복되는 추락의 끝에서 율리에가 마주하는 건 악셀의 죽음이다. 영화는 악셀과 율리에가 삶의 끝자락에서 나누는 대화를 보여주는데 긴 시간을 할애한다. 한 때 연인이었던 이들의 추억을 되돌아보고 어린 악셀이 존재했던 장소들을 따라가면서 죽음을 기다리는 자의 마지막을 비춘다. 요아킴 트리에 감독은 죽음이라는 소재를 비교적 진중하게 다루며 관객들로 하여금 사랑 이상의 삶을 성찰하게 한다.


죽음 후에 생명이 있는 것처럼 악셀의 죽음을 끝으로 율리에는 성장한다. 사랑했던 이를 떠나보낸 후, 허망한 표정으로 오슬로 전경을 바라보던 율리에의 얼굴에 새벽을 이겨낸 태양 빛이 물든다.


영화는 공간으로 율리에의 성장을 암시한다. 영화의 12장까지 율리에의 집은 나오지 않는다. 그녀는 악셀의 집에서 생활하고, 어머니의 집과 아버지의 집을 오가며, 악셀과 헤어진 후에는 에이빈드의 집에서 생활한다. 타인의 공간을 전전하던 율리에는 에필로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신의 공간을 찾는다. 그렇게 율리에는 두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누군가의 연인으로, 시대의 파도를 견뎌내는 여성으로, 방황하는 젊음의 초상으로, 끝내 성장하는 인간으로 기록된다.


'사누최'는 사랑이 아닌 삶으로 읽어낼 때 더 깊이 감상할 수 있는 영화다. 이 영화는 우리 모두 율리에와 다를 바 없는 최악의 인간은 아닌지 씁쓸한 질문을 던지며 '사랑할 때'가 아닌 '살아갈 때'의 이야기를 전한다. 영화의 원제가 '세상에서 가장 최악인 인간 (Verdens verste menneske, The Worst Person in the World)'인 이유다. 영화의 프랑스판 제목 또한 '율리에, 12장 (Julie, en 12 chapitres)'으로 이 영화가 율리에의 사랑이 아닌 율리에라는 인물을 조명하는 영화임을 밝힌다.


한국의 수입 배급사는 어느 정도 수익이 보장된 제목을 선택하면서 영화의 해석 가능성을 다소 섣부르게 제한했다는 인상을 남긴다. 관객들은 제목에 붙은 '사랑할 땐'이라는 조건에 따라 율리에라는 인물의 선택을 사랑하고 있는 한 여성의 선택으로 바라보았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 지인들과의 자리에서 '사누최'가 주제로 등장할 때마다 오직 율리에의 사랑 방식에 대한 의견이 주로 오갔던 사실은 앞선 추측을 어느 정도 뒷받침하는 듯하다. 문화적 관습에 따라 덧붙여진 조건으로 인해, 사랑과 함께 삶을 이루는 것들에 대해 상상하고 고찰할 기회 하나가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더 나은 벌이를 위해 철학이 도구가 되고 본질이 해체되는 시대. '사누최'의 네이밍 사례에서 다시 한번 마케팅의 진짜 역할에 대한 질문이 함께 떠올랐다. 수익이라는 목표를 초과 달성한 마케팅이 정작 브랜드의 본질을 흐릴 때, 대상에 담긴 진짜 의미를 가릴 때 마케팅은 과연 제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수익을 택하고 의미를 포기한 마케팅은 여전히 설득력을 지닐까? 자본이 지속성의 기반이 되는 시장이기에 쉽게 단언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가능성은 없었는지, 어쩌면 타성에 젖은 쉬운 선택은 아니었는지 여러 아쉬움 섞인 질문들을 던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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