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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 나그네 Jun 25. 2020

아테네,멀리 있는 것이 아름답다

 주5일제를 하기 이전 유일하게 학교에 가지 않았던 날은 일요일이었다. 등교에 맞춰 일찍 일어날 필요가 없는 유일한 요일이었지만, 단 한 번도 늦게 일어나본 적이 없었다. 어린 소년의 청개구리 병도 한몫을 했겠지만, KBS에서 방영되는 <디즈니 만화 동산>을 시청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가끔 박찬호 야구 중계나 박세리 골프 중계 같은 이유로 <디즈니 만화 동산>이 결방되는 날은 온전한 일요일을 누리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다. 놀이시설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시절이기도 했고, 유튜브는 물론 재방송을 볼 수 있는 경로조차 매우 제한됐기 때문에 더욱 아쉽게 느껴졌다.


 각종 디즈니 만화는 모두 봤었던 것 같다. 봤던 것을 또 봐도, 예측의 즐거움이었는지 질리지 않았다. 특히, <헤라클래스>가 방영되는 동안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관심이 생겼다. 더불어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대 철학자가 고대 그리스 시대의 사람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계기였다. 또, 만화 속에 그려지는 아테네 도시의 유적들을 직접 방문하고 싶다는 염원이 가슴 깊이 자리 잡았다.


 언젠가는 방문해야겠다 생각하고 있던 찰나 기회가 좀 더 빨리 올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가 생겼다. <이윤기의 그리스로마 신화>라는 책이 한창 베스트셀러로 모든 서점의 책장 곳곳을 채우고 있던 당시, 독후감 공모전 부상으로 그리스 여행이라는 파격적인 상품이 걸렸다. 매력적인 부상이었고, 독후감을 쓰며 그리스에 당장이라도 도착할 것만 같은 착각의 늪에 빠졌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인생은 실패하는 경험이 더 많다는 것을 제대로 몰랐다. 전국에서 글을 잘 쓴다는 사람은 모두 모였을 텐데, 쉽게 당선될 것 같다는 순수한 생각을 했다. 떨어진 후, 하루 정도 기분이 나빴던 것 같은데, 결국 내 돈을 내고 직접 여행하라는 계시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10년이 좀 더 흐른 후, 어부지리로 아테네를 여행할 수 있게 됐다. 유럽 배낭여행을 하던 기간, 헝가리 여행을 마치고 다음 여행지를 모색하던 중이었다. 이탈리아 아니면 그리스를 가려고 했었는데 비용의 문제로 그리스로 향하기로 했다. 지금도 생각만 하면 그리스 여행은 농도 짙은 짠내로 가득했다. 배낭여행의 끝이 다가올수록 예상치 못한 지출로 절약 정신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고, 버스를 타고 헝가리에서 그리스로 가기로 결정했다. 그때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두 번 다시 버스를 타고 장거리를 가고 싶지는 않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25시간 버스를 타는 일은 보통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몰랐으니까 가능했던 일이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국경을 넘을 때마다 각국 경찰이 버스로 올라와 여권 검사도 했다. 그 버스 안에 유일한 동양인이었던 나는 집중 감시 대상자였고, 그리스 국경을 넘을 때는 홀로 버스에서 내려 경찰서까지 이동 후 입국 심사 같은 인터뷰도 했다. 본인이 경찰이어서 그런지 한국에서 경찰 급여는 얼마나 되는지 물어보고는 생각보다 많이 받는다는 답변을 했던 기억도 난다. 덕분에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었지만, 절약이란 여간 쉽지 않다는 것을 25시간 내내 몸소 체험하게 됐다. 


 드디어 도착한 아테네. 숙소에 들어가 바로 씻고 누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가장 앞섰다. 무거운 짐을 이끌고 숙소로 들어가 빛의 속도로 샤워를 하고, 누웠었다. 25시간 내내 앉아만 있었던 터라 온몸에 경련이 생기는 것만 같아 일단 누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도착했을 당시 오후 1시쯤이었는데, 이대로 잠들었다간 다음날까지 잠들 것 같아 잠이 들 것 같은 찰나 다시 한 번 몸을 씻고 초인적인 정신력을 발휘하여 여행 준비를 했다. 직업적인 여행을 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가장 먼저 향했던 곳은 파르테논 신전이었다. 다행히 햇볕 쨍쨍한 날씨여서 관광하기엔 안성맞춤이었지만, 파르테논 신전 언덕을 올라가기에는 좀 더 많은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기후였다. 멋진 조경이 없었다면 분노지수와 피로지수가 극도로 높아진 상태로, 높은 곳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을 불만스럽게만 보고 왔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언덕을 올라가야 하는 관광객을 배려하기 위함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조경은 산책로로 활용하기에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고, 조금씩 쉬어갈 수 있는 나무 그늘도 곳곳에 마련되어 있었다. 인내 끝에 파르테논 신전을 직접 볼 수 있게 됐다. 


 처음 그 신전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는 드디어 책에서나 보던 이런 유적을 직접 마주한다는 생각에 벅차오르기도 했었지만, 그 벅찬 감정은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사라져가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볼수록, 뭔가 폐허가 된 신전 같은 느낌이었고 멋있게 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멀리서 그 웅장하고 거대한 신전을 보는 것이 더 큰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이후 보게 됐던 아고라 광장이나 제우스 신전도 마찬가지였다. 가까이서 볼수록 감흥이 떨어졌다. 오세영 시인의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답다”는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멀리서 무엇인가 바라볼 때는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고, 그것을 더 가까이 하고 싶다는 욕망을 할 때가 많다. 그렇지만 막상 무엇인가를 가지거나 경험하게 되면, 상상 속에 생각으로 남아있을 때가 더 가치 있게 느껴지는 것도 분명 있을 것이다. 맛집에서 소개되는 음식을 보고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먹을 날이 정해지면 그 음식을 먹기 이전까지 그려둔 상상의 맛이 실제의 그 맛보다는 더 뛰어난 맛으로 기대되는 경우처럼 말이다. 아테네의 고대 유적들도 그랬다. <그리스 로마 신화>라는 뿌리 깊은 문학의 가치와 결합돼, 상상 속에서는 더 위대한  상징화 작용이 이루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 때문인지 유년 시절 아무 생각 없이 일요일 아침마다 <디즈니 만화 동산>을 보던 시절이 더욱 아름답게 생각되기도 한다. 이제는 돌아가도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순간이고,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시절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고대 연극 극장, 폐허처럼 보이지만 지중해 햇빛이라는 조명이 반사되어 역사를 자랑하는 신전. 또, 아테네 시내 곳곳의 유물 발굴 현장을 보고 있노라면 잠시 동안은 타임머신을 타고 고대 그리스로 이동한 것 같은 착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면서 타임머신을 타고 잠시 어린 시절을 한 번쯤은 돌아가고 싶다는 신화적 상상을 머릿속에 펼치며, 신비하고 아름다운 아테네를 아련하게 가슴에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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