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게임의 고전이자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부루마불 게임을 어릴 때 정말 즐겨했다. 그 게임이 어찌나 재밌던지 친구는 물론 사촌들과 친척들을 만날 때면 그 게임을 하자며 그 게임판을 펼쳤다. 나중에는 그 핑크색 박스를 보는 순간 기겁을 했을 지도 모를 노릇이다. 그렇지만 매순간 함께 지내야 했던 가족들이 받았던 피해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애교라고 할 수 있다. 집에 있을 때마다 그 게임판을 펼쳤다. 심지어 글자도 제대로 읽을 줄 모르는 4살짜리 동생을 데리고 한 적도 있었다. 7살 어린 동생은 아마 그때부터 나의 동생이라는 사실이 극한 직업처럼 여겨졌을 지도 모를 노릇이다. 이런 징글징글한 게임 참여 요구가 너무 스트레스였던 아버지는 졸지에 학교를 다녀온 사이 그 부루마불 게임을 쓰레기봉투에 담아 깨끗이 버렸다. 도박중독마냥 그 부루마불 게임에 중독됐던 것을 치료해야 한다는 것이 표면적인 목적이었지만, 가족들의 온전한 휴식을 보장하기 위한 이면의 목적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잘 설계된 보드게임의 중독성도 한 몫을 했겠지만, 그 보드판에 있는 도시들이 뭔가 알 수 없는 매력으로 다가왔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런던의 땅을 살 수조차도 없으며 그곳에 호텔이나 빌딩을 짓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모든 것이 판타지였고, 더불어 직접 경험하지 못했던 나라에 대한 로망이 결합되어 그 게임에 집착 같은 중독이 생겼던 것도 같다. 지금도 그 게임판을 보지 않고 그릴 수 있을 정도이니 참으로 징글징글하게 많이 했고, 덕분에 각 나라의 수도 이름은 저절로 머릿속에 새겨졌다.
게임으로만 접하던 나라를 언젠가는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처음에는 게임을 하면서 시드니, 아테네 같은 곳을 사고팔기를 반복하며 단순한 지명 정도로 여겼는데, 다시 읽기의 효과처럼 나중에는 그곳이 어떤 공간인지 폭 넓게 알고 싶기도 했고 꼭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유명한 촬영지를 보면서 여행에 대한 갈망이 생기는 것처럼, 게임을 통해서 그런 열망이 생겼다.
다행히 기회가 생겼다. 영어 실력이 모자라 시드니에서 살았던 1년에 대한 보상을 스스로 채워줘야겠다는 생각에 한국으로 돌아오기 일주일 전, 유럽 배낭여행을 과감하게 결정했고 결정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많은 국가를 부지런히 여행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바로 한국으로 돌아오면 두 번 다시 이런 기회가 생기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과 이 같은 과감한 결정을 다시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확신에 선택한 여행이었다. 그 확고한 믿음은 틀리지 않았다. 그 때 이후, 아직까지는 그렇게 긴 시간 여행을 할 만큼의 시간이 생기지도 않았다. 또, 덕분에 여행의 즐거움을 알게 되어 그 이후에도 여러 도시를 방문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여행을 할 때마다 하는 동안 수없이 배낭을 다시 싸야했지만, 단 한 번도 설레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짐가방을 싸면서 다음 방문할 나라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가슴 속이 부풀어 올랐었다. 때로는 기대했던 관광지가 실망스럽기도 했고, 어떤 순간에는 피쉬&칩스처럼 환상을 갖고 있던 음식이 지나치게 맛이 없기도 했다. 그럼에도 배낭의 크기만큼이나 그 안에 새로운 것을 많이 담아올 수 있을 것 같은 기대에 늘 설렜고, 그 설렘을 다시 한 번 반추하며 오랫동안 새겨보고 싶었다. 나아가 그 설렘을 모든 페이지에 담아내 독자들과 함께 나눌 수 있으면 더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