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중매체 속에 드러나는 표준어와 사투리, 그리고 모호한 교양
가을 걷이를 앞두고 있는 평사리의 배경 묘사를 통해 소설 <토지>를 접했다. 수능대비 문학 문제집에서 그 지문을 매우 자주 접했다. 그만큼 뛰어난 문학성을 지닌 작품인 동시에 수능 문제로 여러모로 출제하기 용이했을 것이다. 더불어 박경리 작가의 수작일 뿐만 아니라 엄청난 대작으로 논의될 거리도 상당히 많은 작품이었다. 언젠가는 그 대하 소설을 모두 읽어야겠다는 엄청난 다짐을 했지만 실패했다. 여러 차례 시도를 했었지만 5권을 넘어가지 못했다. 그러던 찰나 SBS에서 <토지>를 드라마로 방영했다. 소설보다 접근성이 훨씬 좋았을 뿐만 아니라 대하소설과 조금은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라 생각하며 그 드라마를 모두 시청했다. 물론, 어느 정도 원작과 차이가 있고, 어떤 대상에 대한 묘사를 글로 접할 수 있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대작을 이렇게 쉽고 재밌게 접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아쉬움을 충분히 상쇄할 수 있었다.
“찢어 죽이고 말려 죽인다”는 말을 자주 했던 최참판댁 외동딸 서희의 캐릭터는 아주 매력적이었다. 누구라도 서희 앞에 있으면 주눅이 들것 같은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 카리스마를 내뿜는 근원에는 캐릭터 자체의 강인한 성격과 타고난 사회경제적 배경도 있었을 것이고, 더불어 경남 지역에 살고 있는 다른 평민들과 달리 늘 표준어를 구사했던 것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서희를 비롯한 최참판댁 양반들은 드라마가 방영되는 동안 단 한 번도 사투리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는 비단 드라마 <토지>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다른 사극에서도 양반은 지역에 관계없이 늘 표준어를 사용하고 있었고, 하인들의 경우 한양에서 일을 하고 있더라도 사투리를 쓰는 경우가 많았다. 실질적인 고증을 해봐야겠지만,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이라는 표준어의 정의에서 양반은 감히 교양 없이 사투리를 쓸 수 없다는 것에 방점이 찍혔던 것은 아니었을까.
뿐만 아니라, 대중매체에서 영화나 드라마에 출현하는 조폭은 작품의 배경이 수도권이라고 해도 늘 사투리를 사용한다. 물론, 다른 지역에서 상경한 사람들이 조폭으로 활동한다는 설정 가능할 수 있겠으나, 어떻게 조폭은 모두 수도권 외 지역에서 상경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인지도 의문스러운 지점이다. 조폭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교양이 없다는 가정으로 대중매체를 만들면서, 사투리를 사용하는 설정을 강하게 입혀놓은 것은 아닐까 하는 강한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다.
표준어는 교양이라는 정의 덕분에 특권화 되어 버렸다. 또, “서울 사람들이 두루 쓰는 말“로 정의되면서 수도 서울은 더욱 높은 위치를 차지하게 됐고, 지역 도시는 자연스럽게 한 단계 급이 낮아진 상태로 되어버렸다. 1988년 1월 문교부에서 고시한 표준어의 정의는 다소 폭력적인 것은 아닌가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다. 표준어는 말 그대로 ‘표준’이라고 할 수 있는 언어를 정의하면서, 대중들의 소통에 큰 어려움이 없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부분이다. 그렇지만 이 정의가 바람직한지는 당연하게 받아들여도 되는지 의문스러울 때가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표준어를 구사하는 것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으며 사투리가 심한 사람 중에 하나였다. 정확한 소통을 위해서는 자막이 필요한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고 해서 김영삼 전 대통령을 교양 없다는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 사투리의 친근감(?)은 전무후무했던 정치유머집인 “YS는 못말려”시리즈가 흥행을 하는데 일조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에서 화영(김희애 배우)은 은수(하유미 배우)에게 교양이 없다는 식으로 말을 하지만 극중 은수의 대사가 표준어와 거리가 있다고 생각한 시청자는 거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1936년 조선어 학회에서 "표준말은 대체로 현재 중류 사회에서 쓰는 서울말로 한다."라고 정의했다. ‘중류 사회’의 모호성을 해소하기 위해 1988년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로 바뀌게 된다. 중류사회의 모호성을 해소했지만 ‘교양 있다’는 표현을 통해 모호성을 더 가중시킨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표준어를 사용할 줄 모르면 교양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폭력성까지 내포하고 있어 한편으로는 사회 통합의 방해요소로 작용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표준어가 규정이 발표된 지 30년이 지났다. 과연 표준어의 정의가 바람직한지, 특히 표준어의 정의 속에 있는 “교양 있는”이라는 표현이 당연한 것인지 다시 한 번 곰곰이 따져봐야 할 때는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