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을 공부해야 하고, 상식을 평가받을 수 있는 나라, 대한민국
통화스와프, 은산 분리, 누벨바그, 경제고통지수, 착한 사마리아인 법, 미란다 원칙, 테이퍼링, DSR,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 이 용어들은 모두 ‘기본 상식’으로 알고 있어야 하는 용어였다. 처음으로 이 같은 용어들을 접했을 때 상식선상에서 이미 알고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때문에 스스로 이렇게 상식이 부족한 사람인지 자괴감이 들었다. 전혀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았고,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것들이 조금 있는 정도였다. 상식이라고 언급하고 있었지만 ‘상식 밖으로’ 너무도 어려운 단어들로 다가왔다. 다행히도(?) 이 같은 종류의 상식을 ‘상식선’에서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필자뿐만은 아니었다.
이 같은 단어들을 상식의 영역이 상식이라는 것을 알게된 것은 취업 준비를 할 때부터였다. 많은 기업에서 필기시험 과목 중 하나로 ‘상식’을 출제하고 있었다. 출제되고 있는 기출 문제들을 봤을 때, 도저히 상식 수준에서는 알 수 없는 부분들이 많았다. 출제되는 영역도 제한적이지 않았다. 문학, 역사, 과학, 철학, 경제, 미술, IT 등 다양했다. 대한민국 기업에서 일을 하기 위해서는 아주 높은 수준의 상식이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토록 높은 수준의 상식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면 상식으로 출제되고 있는 것이 상식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상식적'으로 인지하고 있을 것도 같은데, 취준생의 허황된 믿음일 뿐이었다. 결국 기업에서 일할 수 있는 '상식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방대한 양식의 상식을 공부해야만 했다.
상식은 '일반적인 사람이 다 가지고 있거나 가지고 있어야 할 지식이나 판단력'라고 정의되어있다. 그렇지만 취업시장에서 상식의 정의는 무척 달랐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알고 있어야 하는 지식수준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다. 아주 다양한 종류의 총체적 잡학 지식이었다. 또, 보통 사람이 보통 알고 있다면 굳이 시험을 볼 필요도 없는 영역이라 할 수 있다. 취업시장에서 상식이 이토록 어려운 내용을 모두 포함하게 된 것은 그것을 '시험'으로 출제하게 되면서부터가 아닐까 싶다.
상식이라는 것이 누군가를 변별하는 시험의 영역으로 편입되면 변별력을 갖출 수 있는 문항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즉, 누군가는 틀릴 수도 있는 쉽게 알 수 없는 영역의 것도 출제를 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렇게 하려고 하다 보니, 도저히 상식의 수준에서는 문제를 출제할 수 없었을 것이고 상식의 문제는 더욱 심화되면서 출제되는 영역도 광범위해졌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육 수준과 지적 수준이 점점 높아지는 취준생을 더욱 확실히 분별하기 위해서, 상식은 고급 지식수준에서 출제되어야 했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더 유능하고 똑똑한 인재를 선발하기 위해 고급 지식에 가까운 상식을 필기시험 과목의 영역으로 포함 시키고, 또 더 심화된 지식을 평가하고 싶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기업에서 수행하는 직무의 적합 여부를 판단하는데 얼마나 연관성이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물론, 과거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발달되기 이전에는 그러한 지식들이 두뇌에서 바로 바로 출력되어 업무에 응용하는데 도움이 됐을지도 모르겠으나, 2020년 현재는 스마트폰이 고급지식에 대한 정보를 개개인의 두뇌보다 더 높은 정확성으로 빠른 출력에 보탬을 주고 있다.
사회적 낭비다. 기업에 입사해 업무상 거의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을 공부해야 하는 취준생의 시간도 아깝지만, 기업의 입장에서도 업무상 더 필요한 것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필기시험 과목을 선별했다면 입사한 직원들을 교육하는 시간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더 이상 '상식'이라는 이름 아래 시험을 봐야만 불상사는 근절되었으면 좋겠다. 어떻게 상식을 공부해야만 하고, 그 어려운 것을 모른다고 해서 상식이 부족한 사람이 되어야만 하겠는가. 기업에서는 유능하고 직무에 적합한 인재를 선발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지 다시 고민하고, '상식'의 정의를 바로 세워 더 이상 상식을 책으로 공부하지 않아도 상식이 모자라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