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이라는 긴 기간을 다른 곳에서 살아보는 경험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래서인지 짐을 쌀 때부터 도대체 어느 정도로 싸야 할 지, 뭘 챙겨야 할지 고민이 컸다. 출발하기 전에 아무리 열심히 싸도 완벽한 짐싸기란 존재하지 않는다. 현지에 막상 도착하고 나면 이건 가져올걸, 이건 가져오지 말걸 하는 후회가 생기기 마련이다. 사람마다 필요로 하는 것과 기준이 제각기 다르지만, 내가 경험했을 때 유용했던 것과 괜히 챙겼다 싶은 것 몇 가지를 꼽아 보았다.
가져올걸
세부에 도착하자마자 후회한 것은 바로 유심이었다. 현지 유심을 구매해서 쓰는게 훨씬 저렴하다기에 아무 생각 없이 왔는데, 나는 토요일 새벽에 도착했지만 OT는 월요일이었기 때문에 그때까지 와이파이존이 아닌 곳에서는 인터넷을 사용할 수 없었다. 문제는 내가 묵는 기숙사는 방에서 와이파이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빠르게 뭔가 검색하거나 밖에 외출했을 때 지도를 켜서 봐야 하는데 그게 되지 않으니 너무 막막했다. 당장 2~3일까지만이라도 버틸 수 있는 유심을 한국에서 챙겨왔다면 훨씬 편했을 것이다. 지금은 현지 유심을 사서 앱으로 데이터를 충전해가며 사용 중이다.
이외에는 사실 세부시티에서도 웬만한 것들은 다 살 수 있기 때문에 돈만 넉넉하게 챙겨와도 충분히 생활할 수 있다. 하지만 좀 특수한 것들, 내가 고집하는 브랜드의 제품들은 혹시나 없을 수도 있기 때문에 챙기는 것이 좋다.
예를 들면 화장품의 경우, 피부가 민감하다면 내가 원래 쓰던 브랜드의 제품이 세부에 없을 수도 있다. 왓슨스나 BTC몰에 수많은 제품들이 있지만 내가 쓰던 제품을 혹시나 하고 찾아보았는데 찾을 수 없었다. 세부는 습하니까 보습에 신경을 덜 써도 될 줄 알았는데, 실내에 머무는 시간이 길다 보니 피부가 상당히 건조해져서 집에 두고온 화장품들이 너무 아쉬웠다. 그래서 아얄라몰에 갔을 때 더 바디샵에 들러 급한대로 미스트를 하나 샀는데, 나중에 검색해보니 한국에서 파는 가격보다 비싸서 마음이 아팠다. 너무 리치하지 않은 보습크림, 미스트는 쓰던 제품을 꼭 챙겨오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아이가 자주 먹던 비건 마요네즈를 챙겨오지 않은 것도 좀 아쉬웠다. 우리나라에는 비건 제품을 파는 곳이 급속도로 늘어가고 있지만 세부는 아직이다. 기숙사 식사에서 양배추 소스로 매번 마요네즈와 사우전드아일랜드 소스가 나오는데, 아이는 계란 알레르기 때문에 먹을 수 없어 아쉬워했다. 급한대로 오리엔탈 드레싱을 가이사노몰에서 구해 뿌려 먹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다.
장난감이 워낙 없다 보니 아이들은 태블릿을 보거나, 굴러다니는 종이를 접어 가지고 놀고 있다. 세부는 공산품의 질이 별로라고 들어서 나름대로 연습장, 필기도구 등을 챙겨왔는데 아이들이 소진하는 속도가 워낙 빨라 감당이 되질 않는다. 공이나 비눗방울, 색종이, 줄넘기 같은 아날로그 장난감들을 많이 챙겨왔더라면 아이가 친구들과 훨씬 더 재미있게 놀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래도 우리보다 먼저 연수를 마치고 떠나는 분들이 남은 색종이를 주고 가셔서 근근히 공급이 이뤄지고 있다.
참, 텀블러를 깜빡 잊고 챙겨오지 않은 것도 많이 후회가 된다. 아이가 수업을 갈 때는 물을 챙겨줘야 하는데, 깨질 수 있는 머그컵을 챙겨줄 순 없는 일이다. 수하물 무게를 맞추느라 이것저것 빼느라 텀블러를 못 챙겨왔는데 현지에서 사려니 퀄리티가 영 내 맘 같지 않았다. 다시 세부에 오게된다면 텀블러를 1순위로 챙길 것 같다.
또 일명 돼지코라 불리는 어답터 플러그도 하나쯤은 꼭 챙겨올걸 후회했다. 물론 기숙사 방에선 220볼트도 문제 없이 사용할 수 있지만, 와이파이가 잘 돼서 아이들이 오래 머무는 로비 콘센트는 헐거워서 충전이 되질 않는다. 110볼트를 끼워야 빠지지 않고 충전이 된다고 해서 현지에서 구입했는데, 사실 한국에서는 몇 백원이면 사는 것을 비싸게 사려니 돈이 좀 아까웠다.
가져오지 말걸
세부에 올 때 캐리어 3개, 총 45kg을 가득 채워서 왔다. 그 중 한 캐리어는 거의 아이가 먹을 과자, 고구마 말랭이, 햇반, 컵떡볶이 등으로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막상 현지에 와보니 한국 마트에서 대부분 파는 제품들이었고 가격도 한국에서 사는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아얄라몰에는 노브랜드 매장이 있고 한국 노브랜드와 똑같은 제품들을 판다. 차라리 그 캐리어에 장난감을 채워올걸...하는 후회가 남는다. 지금 이틀에 한 번 꼴로 한국 마트에 가서 아이가 마실 두유와 반찬이 맘에 안 든다고 할 때 먹일 참치, 그리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한국과자를 잔뜩 사고 있다.
김자반도 스틱으로 된 제품을 수십 개나 가져왔는데, 현지에 와서 식당에 가보니 아이들이 한국마트에서 산 김자반 큰 봉지를 아예 식사 때마다 들고와서 뿌려 먹고 있었다. 어차피 맛은 똑같은데 뭐하러 짐 되게 들고왔나 싶다.
내가 머물고 있는 어학원 기숙사는 특이하게도 물이 깨끗하다. 자체적으로 연수기를 거쳐서 물을 공급한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샤워기 필터와 세면대 필터가 8일이 지나도 하얗고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걸 알았더라면 샤워기 필터, 세면대 필터 리필을 10개씩 챙기지 않아도 됐을텐데...짐도 훨씬 줄었을텐데...하지만 이건 우리 어학원이 특수한 케이스고 다른 곳들은 필터가 이틀이면 갈색이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잘 알아봐야 한다.
종이컵과 세제, 수세미도 혹시나 해서 챙겨왔는데 현지에 오자마자 머그컵을 구입하니 쓸일이 없고 세제와 수세미, 고무장갑도 모두 현지 공수 가능했다. 빨랫줄도, 빨랫집게도 마찬가지다. 이런 자잘한 용품들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으니 짐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놓고오는게 나을 뻔했다.
가져오길 잘했다
내가 가져온 것 중 가장 만족스러운 아이템은 바로 방수 침대커버와 방수 베개커버다. 기숙사 침대와 베개에 물론 침대커버, 베개커버가 씌워져 있긴 하지만 우리나라 호텔처럼 빳빳한 퀄리티는 절대 아니다. 얇디얇고 일부는 약간 찢어져있기도 하다. 아무래도 여러 사람이 썼던 침대와 베개를 이렇게 얇은 커버 하나만을 덮고 쓰기엔 찜찜함이 크다. 퀸 사이즈 침대커버 하나만 챙겨온게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가족실 4개의 싱글침대 중 하나라도 씌워서 쓸 수 있음이 감사하다. 베개커버는 2개 챙겨와서 아이와 하나씩 쓰고, 빨래 맡길 때마다 벗겨서 일 주일에 한 두 번 맡겨 깨끗하게 쓰고 있다.
접이식 커피포트 역시 안가져왔으면 어쩔뻔 했나 싶다. 복도에 정수기가 비치되어 있지만 여러 사람이 공용으로 사용하다 보니 컵라면이 먹고 싶은데 물이 뜨겁지 않은 경우도 있고, 정수된 물이라도 어쩐지 한 번 끓여서 먹고 싶을 때도 있다. 또 물 뜨러 여러 번 머그컵을 들고 왔다갔다 하기 귀찮아 커피포트에 물을 가득 채워두고 필요할 때마다 따라 마시기도 한다.
또 혹시나 해서 라면포트도 들고왔는데, 아이 컵떡볶이가 정수기 물만으로는 익지 않아 딱딱할 때 라면포트에 넣어 끓이니 말랑하고 맛있게 조리되어 매우 만족스러웠다. 한국마트에서 비비고 사골곰탕, 설렁탕 같은 레토르트 식품도 많이 팔기 때문에 아이가 급식을 거부하거나 도저히 먹을 수 있는 메뉴가 하나도 없을 때 간단하게 만들어 먹일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매 끼니 급식 먹다 보니 조리하는 것조차 귀찮아져 아직 시도하진 않았다.
수건은 한국에서 꼭 챙겨오는게 좋다는 이야기를 오기 전부터 많이 들었다. 현지 수건은 우리나라 수건과 퀄리티가 다르고, 생각보다 많이 쓰게되니 넉넉히 1인당 5장씩은 챙기라고 해 그대로 챙겨왔다. 혹시나 수건이 모자랄 때를 대비해 스포츠타월도 챙겨오고, 아이가 수영할 때 쓸 비치타월도 따로 챙겨왔다. 수건 모자랄까봐 축축한 수건 재활용하지 않고 뽀송하게 쓸 수 있어 만족스럽고, 정 없으면 스포츠타월을 쓰면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놓인다.
고작 한 달이라지만 혹시나 아플까 싶어서 한국에서 약국에 들러 약을 몇만원 어치 사왔다. 감기도 종합감기약뿐만 아니라 콧물약, 기침약 등 세분화해서 사오고 장염약, 해열제는 물론 이비인후과에서 건조시럽 형태로 된 항생제도 처방받아오고 심지어 배아플 때 붙일 핫팩까지 챙겨왔다. 생각보다 부피도 크고 너무 오버하나?싶었지만 수영하느라 콧물이 떨어지지 않는 아이에게 콧물약을 먹이고 있고 배 아픈 아이 친구를 위해 핫팩을 빌려주기도 하며 하나하나 소진하는 중이다. 약은 최대한 세분화해서 단단히 챙겨오는게 좋을 것 같다.
세부에서 택배를 받으려면 해상택배는 약 3주가 걸리고, EMS도 상당히 오래 걸린다고 들었다. 그러니 나처럼 한 달 살기로 온 사람들은 한국에서 택배를 보내도 택배가 오기도 전에 집에 가는 날이 먼저 와 버린다. 최대한 현지에서 공수할 수 있는 것들은 하고, 없으면 또 없는 대로 적응해보는 경험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