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궁창에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하다
우리의 첫 시작은 40년 된 낡은 아파트였다.
‘신혼집이란 당연히 작게 시작하는 거지!’라는 나의 호기로운 생각도 아이를 낳고 아이의 짐이 산더미가 되어가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집에 물건을 맞춘다 했던가. 아무리 집이 작아도 아이 물건은 없어선 안 될 꼭 필요한 필수 아이템처럼 느껴졌고, 그렇게 이고 지고 꾸역꾸역 살아가던 어느 날….
아이가 점점 걷고 뛰기 시작하니 이제는 층간소음이 내 뒷목을 잡았다.
한 번도 얼굴 뵐 일 없던 아래층 주민과 부끄럽게 마주쳐야 했다.
나는 ‘걷는 재미를 느끼는 아이’와 그 걷는 아이 옆에서 ‘더 성큼성큼 걷는 남편’을 닦달하는 무서운 엄마와 마누라가 되고 말았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새로움의 연속이구나.”
솔직히 기저귀 갈아주고 배고플 때 잘 먹이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늘어나는 짐과 이웃 간의 문제는 예상치 못한 임신만큼이나 예상하지 못한 스토리였다.
하지만 짐도, 이웃 문제도 예고편에 불과하였으니… 나에게 스트라이크 펀치를 날린 건 어린이집이었다.
도우미, 친정엄마 없이 오로지 남편과 내가 일정을 조정해가며 아이의 등·하원을 책임져야 했다.
그러니까, 불쌍해서 도저히 봐줄 수 없는 육아 독립군! 쭈구리 워킹맘이 바로 나였다.
그런 나에겐 일찍 문을 열어주고 늦게까지 아이를 돌봐주는 어린이집이 이 세상의 등불이요, 사랑이고, 전부였다.
슬프게도 조건이 맞아 잘 다니고 있던 어린이집은 아이가 4세가 되면 졸업해야 했다.
짬짬이 7세까지 다닐 수 있는 다른 어린이집을 알아보았지만 마땅한 곳을 찾기 어려웠다.
아무리 맞벌이라 해도 한 자녀 아이를 가진 부모에겐 기회가 없었다.
일찍 문을 열어주고 늦게까지 돌봐주는 국공립 어린이집 순번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버렸다. (치사하고 더러우면 아이를 하나 더 나으라 하던데….)
유치원은 추첨제인데 이것도 하늘이 ‘Pick’ 하는 거란다. (나 같은 똥손이 과연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렇게 아직 벌어지진 않았으나 곧 벌어질 어린이집 졸업을 앞에 두고, ‘이래서 엄마들이 사표 쓰고 하나같이 집으로 이직을 하는 거구나’ 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울 때…
“공동체 주택의 조합원을 모집합니다.”
우연히 매력적이면서도 모호하고 신비한 타이틀을 클릭하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