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ravis and Johnnie Feb 13. 2023

선한 자, 악한 자, 미지근한 자

악한 딜레마의 양자택일

  오직 하나님께서 세우신 정의에 충실한 믿음을 가진 선한 자가 세상에서 대접받는 법 세 가지. 같은 방향으로 동행하는 선한 이에게는 치하와 공경을 얻고, 그 반대편에 선 악한 이에게는 비난과 멸시를 얻으며, 중립적인 입장의 미지근한 자에게는 일단은 무관심이겠으나, 굳이 따지자면 비호감을 얻는다고 한다. 

  여기서 속된 악인의 정확한 의미를 알 필요가 있다. 악인이란 곧 자신의 유불리 즉 자기애의 만족을 척도로 옳고 그름의 기준이 서는 사람을 일컫는다. 내게 유리한 것은 선하고 좋은 것이요, 불리한 것은 악하고 나쁜 것이라는 취지인지라 입장 변화에 따라서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로 돌아설 수도 있고, 어제의 갸륵한 우정이 오늘의 피 끓는 적개심으로 변모할 수도 있다. 진실을 말하는 자라도 그 진실이 내게 불리하면 그 사람은 악인이요, 거짓을 공모하는 자라도 그 거짓이 내게 유리한 것이면 그 사람은 의인이 된다. 

  어디 범죄 영화 속에나 등장할 법한 사기꾼, 파렴치한, 철면피, 무뢰한들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그 스케일의 규모를 떠나서 나 자신에게 돌아올 이익을 절대적 구심점으로 꾸린 이기심의 에너지로 삶을 운용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일상적인 모습이라는 것이 불편한 진실이다. 보편적 선의를 지향하는 사례를 통해서 가장 알기 쉬운 예시를 들자면, 전쟁 지역에 구호 의료 활동을 떠나고 싶어 하는 의사 남편을 결단코 막아서는 아내, 세상적인 성공을 뒤로하고 빈민 구제를 위해서 외진 곳의 선교 활동을 결심한 아들에게 실망하여 호통치는 아버지처럼 사랑을 빙자한 이기심의 발로도 지극히 당연하고 평범한 인간적 모습이다. 그러니 우리는 과연 얼마나 자연스러운 이기심의 본능을 스스로 인지해내고 견제할 수 있을까?

  나 자신도 예외는 아니다. 억압과 분노를 표출하는 다양한 경로 중에는 ' 타(他) 대상 애(愛)'에 가까운 '공격적 집착'이란 양상이 있는데, 이는 사랑하기에 상대를 공격하는 행위라고 설명된다. 때때로 나는 내게 가장 만족스러운 결과를 유도하기 위해서 내가 사랑하며 동시에 의존하는 소수의 대상을 인위적으로 교정하거나 상황을 조작적으로 인지하는 등 내 입맛대로의 조절권과 통제권을 누리고 싶어 했다. 그 행위가 스스로 당당했던 이유는 그것이 상대방에게도 이로움으로 작용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인데, 그건 내 편협한 착각에 지나지 않으며 하나님 보시기에는 오만하고 흉흉한 악인으로 비칠 법한 무수한 죄를 번번이 저지르고 있던 것에 불과하리라.

  한편 나머지 의존하지 않는 대상에 대해서라면 나는 오랫동안 세 번째 입장을 표명하는 중립적 인간이기도 했다. 어떤 가치에 내가 가질 수 있는 진심과 책임을 다하는 모습은 분명 아름답지만, 이는 매우 피곤하고 골치 아픈 일이기도 하다. 소모적인 분쟁을 삼가고 평화를 수호하는 척 부조리에 대한 무기력을 위장하는 심리에서 대부분의 껄끄러운 것들은 보이지도 않는 양 무관심으로 일관했으나, 이따금 그 외면의 바리케이드를 넘어서는 분란을 조장하는 대상에 대해서는 선뜻 비호감을 내비쳤다. 내가 제일 경멸하는 부류가 소설 '백치'에서 주인공 백치가 드러내는 사랑의 진면목을 알아보지 못하고 평화롭던 맑은 도랑을 흐리는 미꾸라지라고 눈엣가시로 평가하는 소위 눈 뜬 장님 같은 사람들이었는데, 씁쓸하게도 나 또한 이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최근에 기묘하게도 도처에서 끊이지 않는 일련의 자극들을 통해서 도무지 인정할 발상의 여지조차도 없던 내 모습에 대해서 깨닫고 인정하게 되었다. 나는 자기만족을 위한 이상주의에 눈이 멀어 뵈는 게 없는 '프로 불편러'이다. 보기 드문 외면의 기술에 힘입어 온 것과는 별도로, 몹시 예민한 기질적 태생 치고는 좀처럼 염려를 하지 않는 초연한 인간인 줄 알았는데 어림 반푼 어치도 없는 소리지. 나의 자기애는 과도한 자기 방어 기제라는 한 뿌리에서 염려와 데칼코마니처럼 전사된 닮은꼴인 불편감(불쾌함과 언짢음)으로 많은 자극을 해석하고, 그로부터 얻어지는 모소적 빈정과 야유의 에너지를 내 유쾌한 이단적 개성을 추진하는 자가 원동력으로 삼았다. 

  이로서 딜레마의 양자택일이다. 쾌적함을 최우선으로 우대하는 공작으로 기질을 죽이고 나사를 풀어버릴수록 그만큼 불편은 줄어들지만 자의식은 둔감해지고, 그로 인해 억압되는 개성이 참지 못하고 폭발하면 불편감이 적발하는 대로 무엇이든 처단의 제물로 삼아야 직성이 풀리는 악함의 딜레마. 무엇이 진짜 부조리인지 객관적으로 판단할 공간도 재량도 갖추지 못한 주제에 말이다. 표리부동한 자신에 대한 불신만큼 괴로운 것이 있을까. 스스로 타고난 인격적 소양을 못내 못 미더워하며 구제불능의 낙오자라는 시나리오를 쓰는 것은 근원적 양심과 근원적 불신의 격한 충돌이다. 표면적으로 '선한 척'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인이 아니라고 나의 내면이 깊이 신뢰할 수 있는 실재적 공식이 부재했던 탓이다. 

  내가 이것을 깨달을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내게 필요한 '찔림'의 포인트를 스스로 알 수 있는 적절한 지침의 방식으로 수차례 일깨워주셨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적어도 '인정'에 의한 의식적 견제가 가능해졌기 때문에 불편을 마주하는 매 순간 익숙함에 굴복할 것인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향을 따르며 새로운 공식을 써 나갈 것인지, 의지를 가지고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자기애가 아니라 하나님의 믿음과 사랑이 내부에서 작용하는 관계를 배우고 소망할 수 있게 되었다. 잘못된 집착이나 욕심으로 내게 유리한 해결의 낙착을 보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와 소통을 앙망하는 것을 통해서 딜레마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세상만사 '가능'으로 전환될 '불가능'을 위해 출범하는 것이 반대증거라면, 다음 변화를 위한 새로운 증거가 요구되는 어귀에서 막다르지 않도록 늘 시의적절한 타이밍으로 어김없이 찔러주시는 그 보살핌에 어떻게 감사로 순종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안 될 일'을 '될 일'로 만들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