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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avis and Johnnie Feb 07. 2023

'안 될 일'을 '될 일'로 만들기

모든 문제의 답은 내 안에 있다

  세상의 눈치를 보는 편은 아니었다. 눈치를 보며 사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닌지라 일부 기능이 결핍되어 불리함을 숨길 수 없는 내 열등한 개성을 빠르게 인정하고 모두가 좋다고 하는 것과의 결별을 별반 아쉬워하지는 않았다. 주변 기색을 살피고 정황을 조종하는 수완을 통해서 개인의 유리함을 기득 하기에 나는 너무 뻔뻔스럽고 주변머리가 없고 지독히 나태하고 관여하기보다는 관람하기 위해 떠도는 먼지처럼 가볍고 무성의하고 하잘것없이 제멋대로 생겨먹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내 방의 밖에서 빛나는 저 별쯤이야 제아무리 영광스럽다 한들 각자 원하는 만치 부디 좋을 대로, 나는 조용히 문을 닫아버린 후 조명을 점등하고 직접 내부를 밝히면 그만 아니겠는가?


  그런데 눈치를 보는 행위의 범주는 외적인 영역만이 전부가 아니라 나에 대해서 내가 눈치를 보는 것도 포함한다고 한다. 뭐라고? 늘 스스로의 눈치를 본다는 것은 바로 내 얘기가 아닌가?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다. 일전의 수업에서 내적 자존의 하락을 염려하여 발생하는 갈등의 양상에 대해서 배운 적이 있는데, 외부에서 나를 초라하게 판단하는 것은 괘념치 않으나 내가 만든 세계의 기준에서 나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완벽주의가 내재되어 있음을 당시에도 인정했었다.

  나는 타고나기를 욕심이 흘러넘치는 분수 대로 염을 담아 있는 힘껏 꾹꾹 눌러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자신에게 경고했다. 자, 여기서 여기까지, 이 경계 내부가 너의 세계이니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자유를 누리도록, 단 이 안에서 만큼은 실망하는 일이란 없어야 한다, 실패란 용납할 수 없다고. 선 밖의 일에는 무심과 무욕으로 대응하는 나를 보고 사람들은 이따금 내가 허심탄회하고 관대하며 소탈한 사람이라고 여기기도 하지만 나는 남몰래 은밀하게, 드러날 일 없는 영지에 국한하여 통제욕과 주도욕이 주체 못 하도록 강하다. 외부적 영향력에 존중으로 감응하지만 정작 내가 물드는 것은 독극물인 양 꺼리고, 누구보다 세상을 올곧게 믿을 자신이 있지만 가능한 모든 반전성을 위하여 가장 치명적인 의심의 칼날을 갈아두고, 그럼에도 만약 내가 끝장까지 믿고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존재한다면 반드시 완전무결토록 고귀한 그 무엇이어야 함을 강하게 주지 시켰다. 


  이제 보니 내가 스스로 번영하고자 그어 놓은 선 내부는 살얼음 위를 걷는 듯한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가성비가 적이 좋지 않은 토양에서 제법 토실한 과수의 열매가 맺어지길 바라는 허황의 탐욕이 흐르는 척박한 곳이었다. 세상으로부터 진정으로 독립된 자에게 어린아이들 땅따먹기 식의 유치한 선긋기 같은 것은 필요치 않다. 개인이 일구어낼 수 있는 참된 독립성의 순수한 힘은 나 외 모든 존재에 대한 사랑의 책임을 함께 부른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 세상에 종속된 자로서 충성을 바치는 것은 꺼림칙하지만 온전하게 독립될 자신도 없어 군주에 저항하여 능청 떠는 작은 레지스탕스인 척 허세를 부리면서 어디 한쪽에 따로 깃발을 꽂아 놓고 그 안에서 가장 쾌적한 여건을 구성하는데 전념했을 따름이다. 

  눈치 보는 법도 엄연히 하나의 고급 기술인데, 나는 세상에게 눈을 흘기고 코웃음 쳤는데도, 세상이 인심 후하게도 내게 그 기술을 아낌없이 가르쳐 주었다. 네 초라한 사회성도 어차피 궐종서부 한 패거리이니 어설픈 돌팔이 행세는 그만두는 것이 미래 자아의 수호에 당위적일 것임을 넌지시 교시하면서 말이다. 이러나저러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영혼의 모습 있는 그대로 누리고 즐기며 사는 법을 모르는 마당에, 이것이 내 자존심이오 등 돌린 채 고집부리다가도 자꾸 귀가 솔깃해질 법도 하다. 사람이 솔직하지 못하고 떳떳하지 못하면 눈치를 보지 않을 수는 없는지라, 바람 불면 날아갈까 비 내리면 무너질까 내적 자존감을 염려하여 그 고귀하신 비위를 어떻게든 맞추고자 했던 자기애가 두 가지 치명적인 인지 습관을 만들었다. 


  첫째, 내적 수용의 역량과 범주에 신경 쓸 일 없는 폐쇄적 환경 속에서 형성된 <통증 인지 오류>.

  둘째, 치졸한 이기심에 좀 먹히듯 억압되어 가는 내면이 합리화를 통해 보상받고자 학습한 <타 대상 자원화>. 




  믿음도, 소망도, 사랑도, 가장 순수한 것이자 영구히 변치 않는 것들은 단순하다. 드높은 차원에서 전달되는 심원한 진리가 복잡한 세상에 녹아든 양태를 입체화하는 각양각색의 출력이야 내 이성이 보조하는 영역의 한도 내에서 무한하게 중첩되고 병렬되는 구조의 묘미를 즐길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곧 진리의 뒤틀린 성질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중간에 끼어들어 순수성을 변질시키고 일을 복잡하게 만들어 그르치는 뭔가가 있다면, 그것은 거대한 실타래처럼 얽힌 내 억압의 공식이다.

  물론, 어떻게 해도 변호하거나 부인할 수 없는 치명적인 악행과 부조리가 세상에는 분명 산재한다. 그래서 내 삶이 이다지도 불편하고 힘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정당한 고통보다 훨씬 많은 불편함을 체감하고 살아가는데, 대부분의 경우 그 원인은 외부가 아닌 내 안에 있다고 한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진리임을 나 자신의 숱한 경우를 통해 배우고 또 배운다. 다만 항상 이미 나의 자기애가 한바탕 활개를 치고 난 후 한 발 늦게 자각하고 그제야 기겁하여 오랜 습관에 진저리를 치게 되는 것이 치명적인 뼈 아픔이 될 뿐이다. 


  세상에 아픈 것을 원하는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분명 원 개념은 통증이 아닌데 내가 통증으로 느끼게 된 것이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면, 내게 조금이라도 더 쾌적한 조건과 환경을 찾고자 결코 당도하지 못할 환상 속 유토피아를 언제까지고 꿈꾸는 떠돌이처럼 평생 헤매게 된다. 그리고 푸념하게 된다. "왜 이렇게 사는 것은 힘든가? 내가 문제인가, 세상이 문제인가?" 자기 비하가 되었든 타 대상 비하가 되었든, 가해 의식이 되었든 피해 의식이 되었든, 어느 쪽이든 속에 미움을 품고 산다는 것은 괴로움에 괴로움을 더하는 자멸 외 아무것도 될 수 없다.

  동일하게 마주한 자극이라도 누군가에게는 그다지 아플 것 없는 일이 내게는 너무도 쓰린 문제라면, 누구에게는 수월하게 '될 일'이 내게는 그리 단순하지 못하다면, 나는 도대체 왜 그런 것인지 알기 위해서는 내게 고정된 억압의 패턴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허심하게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느끼는 통증을 조망하고 분별하여 견제해 나가는 과정을 거듭 체감하고 반복할 때 통증은 새로운 나를 위한 연습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재각인이 점차 내면화된다. 나 자신이 부족하고 모자라기에 성장하고 변화할 수 있음을 알고, 부득이한 불완전성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어야 책하고 원망하는 노력이 아닌 기쁘고 충만한 노력이 된다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그리고 스스로 먹혀들 줄 모르고 키워 온 정말 골치 아픈 놈이자 허상과 다를 바 없는 계략이었던 '타인 자원화'라는 악덕함. 공황장애를 겪고 있는 나의 자기 치유를 위한 노력에서 항상 발목을 붙들었던 냉소적 선긋기를 생산하는 주범이자, 나의 숨겨진 내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법한 사건이 터지거나 용기로 마주한 직면을 통해서 스스로 놀라기 전까지는 파급된 범주를 미처 전부 알기 어려울 만큼 내 일부가 된 이기심의 소치. '타인 자원화'라 해서 치열한 경쟁 사회 속 비인간적 면모나 탐욕적으로 권익을 쫓는 서바이버들 따위의 이미지를 손쉽게 떠올리고 적어도 나는 그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자만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타인이라는 존재 이유를 자기애를 보상하는 재료로 삼기 위한 것이라면 그 어떤 포장된 방식이나 타협된 기법도 마다하지 않고 예외 없이 포함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폐색적인 자기애의 속셈에 중용의 미덕은 단연코 쉽지 않다.

  나는 이제껏 자존적 만족감과 쾌적함을 얻고자 하나님께서 지으신 타인의 순수한 개성을 얼마큼 재단하고 평가하며 편의대로 이용했으며, 그 타인이 내게 사랑을 주는 대상이라면 심지어 그 마음을 이용하여 입맛대로 임의 조정하려 시도하기까지 했는가. 상대방을 나의 결핍과 모자람의 보상처로 활용하고 내 불완전성의 쓰레기통으로 만든다면, 그것은 손 쓰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 '의존'이기도 하다. 




  세상에는 갈릴레오 갈릴레이 시대의 천동설 같은 사람이 있다고들 한다. 온 우주의 중심은 이 몸이라서 주변 모든 것이 내 비위에 맞춰 돌아가야 한다고 착각하는 사람의 당당한 요구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 전설 속 기인이라도 보는 것처럼 신기하고, 절로 내리 까는 코웃음이 나온다. 그런데 알고 보면 나도 전혀 다를 바 없어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에 스스로 걸려 넘어진 셈이다. 이제 나는 부족한 나 자신을 타인 앞에서 절제하고 경거망동을 사릴 줄 알아야 한다. '안 될 일'이 '될 일'이 되게끔 단순한 진리를 관통시키는 것은 타인의 역할도, 세상의 몫도 아닌, 내가 나를 위해서 도전해야 하는 과제이다. 반드시 혼자 걸어야 하는 길이라 해서 외로운 여정인 것만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고 동행해주시지 않는가.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며 이용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착각하는 우스꽝스러움을 아무쪼록 버리겠나이다, '찔림'의 수준을 넘어서는 아릿한 절망감을 느끼지 않고 기도를 드릴 수 있다면 무척 좋았겠으나, 나는 다만 새 사람을 입도록 인도해 주심에 감사하며 한참 더 차디찬 회개의 샘에 깊숙이 담가져야 하는 사람일 터이다. 겸손하게 간구하는 마음으로 허다한 허물을 덮는 사랑을 알고자 애쓰는 자의 말에 귀 기울여 주시리라는 믿음에서 출발하는 궤적의 변화, 그것이 진짜 생에 대한 책임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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