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적 성장률 0의 시대에서 새로운 동력원은 무엇인가
나의 진심을 극진토록 고이 담아서 무언가에 매진하고자 노력하는 목적이 회전하는 현상의 원탁에서 특정 좌표를 찍는 결과를 잡아채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그 과정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온전한 몰입의 환희와 열락을 알기 위한 것인가. 나의 선각자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이 세우신 지의를 구하며 그 과정에서 기쁨을 알고 충만을 채운다면 하나님께서 도리에 적합한 물리적 은혜를 아낌없이 채워준다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먼저 필요한 물리적 조건이 충족되면 그제야 전심할 의지를 굳히리라 눈을 가늘게 뜨고 턱을 치켜세우거나 원하는 결과에 대한 기초적 보증이 확보되어야만 승부할 가치가 있다고 계산하는 것이 지혜라고 믿는다.
"있으면 주지." "받으면 하지." "생기면 갚지." "주면 만들지." "열어주면 들어가지."
운명을 상대로 가당찮은 수를 띄우는 수없는 거래의 현장들, 되로 주고 말로 받고 싶은 심보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아멘.
고린도전서 13장 11절
성경 말씀에서처럼 어린아이와 같이 말하고 깨닫고 생각하는 몰입이 무엇인지, 나는 지금 그런 몰입에 얼마나 빠져들어 있는지 생각해 보다가 동생과 함께 했던 꽤 오래전 일을 오랜만에 떠올리며 배꼽이 빠질 듯 박장대소를 했다. 결코 나쁘지만은 않은 의미에서 정신 나간 듯이 제멋대로 살았던 이십 대 시절에는 가장 몰입하던 일 중 하나가 밤새 낯선 도시를 쏘다니는 일이었다. 특히 무더운 여름에는 조금은 밤공기가 서늘해지며 달이 뜨는 시간 께 출발해서 동이 트고 밝아오는 아침을 개운하게 맞이한 후 다시 해가 정오로 향하며 기온이 올라가기 전에 집에 기어들어가 학교나 일을 나가기 전까지 잠시 눈을 붙였다.
딱히 목적지가 있는 것은 아니었고, 그저 멈추지 않고 하염없이 걷는 시간 동안 밤의 도시를 구경하고 수없는 이야기와 아이디어를 나누는 것이 더없이 재미있고 즐거웠다. 때로는 즉흥극을 저들끼리 연기하고 쓰기도 하고, 비록 후일에 다듬어져 제대로 탄생되지도 못한 채 묻혀버리고 말아 그 소생이 기약 없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기똥차기 그지없다고 생각했던 갖은 이야기들을 구상하고 기록했다. 아침이 되어 귀가할 때쯤에는 너무 졸려서 걸으면서도 잠이 들 정도로 피곤했지만 뿌듯함과 충만함이 흘러넘쳤던 그 기분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나는 잠을 자는 것이 제일 행복한 사람인데 그 포근함도 잊을 정도로 자유로운 생각들과 창작에 깊이 심취했던 무수한 밤들에 대한 추억을 생의 전반에 걸쳐 많이 쌓을 수 있었음에 두고두고 감사한다.
당시 그런 몰입의 실천에 단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면, 나만의 시간에 온전히 몰두할 수 있는 밤의 시간이 참으로 즐겁긴 했지만 이런저런 일들로 하루를 소진한 후 막상 밤에 다시 나갈 생각을 하면 피곤하고 귀찮아서 쉬고 싶다, 자고 싶다는 유혹이 나의 발목을 붙들었다는 것이다. 움직이고 몰입하기 시작하면 아무리 힘들어도 더없이 큰 유희가 있다는 걸 아는데, 그 진입의 문턱을 넘는 저항을 항상 디뎌내야만 했다. 그래서 우리가 취한 무식한 대응법은 젊음의 패기로 만들어진 궁여지책의 한심한 발상이었을지 모르겠으나, 밤에 야식을 거하게 먹어 위장을 빈틈없이 꽉 채우는 것이었다. 배가 너무 부르면 쾌적하게 잠들 수 없고 결국 소화시키기 위해서라도 움직이는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불편감을 원동력으로 삼아 오늘 밤도 다시 또 한 번의 여정을 대차게 떠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무절제이긴 하지만 그렇게라도 몸을 사리지 않고 순수한 유희가 가득한 순간으로 향하는 몰입의 계기를 마련하고 싶었던 그 열정이 지금의 내게는 참 부럽지 않을 수 없다.
현 세계의 경제적 정세와 미래 성장에 대한 객관적 위기 상태에 대해서 근원적 핵심을 추출하고 올바르게 전망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왜 바로 지금이야말로 표면적이고 물리적인 성장의 지표에만 목말라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성장, 내적 가치의 성장을 일궈내야 하는 시기인지 예리하게 경각하고 자성한다. 무분별하고 이기적인 성장의 끝은 결국 겉으로는 아무리 그럴듯해도 그 속은 텅 빈 속성이 거품이 터지듯이 드러나며 시스템의 붕괴, 공멸로 이를 수밖에 없음을 조망하면 그 어느 때보다도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의 가치가 돋보이는 빛을 내는 시대가 체감된다. 화려한 포장지로 겹겹이 싸인 위에 더 화려한 리본을 온통 휘감고 있는 커다란 선물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 열어 볼 수 있는 사람은 정작 아무도 없는 것처럼 허상과 같은 전체의 시류에 무분별하게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으로부터의 독립성과 올곧은 내적 중심을 가지고 주체적 삶을 운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지으신 우리 각자의 귀한 영혼은 세상이라는 거대한 기계가 구동하기 위해서 하잘 것 없는 작은 부품으로 그 일부를 구성하고 녹이 슬어 대체되기 전까지 소진되기 위해 지어진 것이 아닐 터이다. 물론 세상은 그 핍박되는 영혼의 갈증을 일시적으로 달래며 본질을 속이기 위한 눈 가리기 식의 달콤함을 제공한다. 많은 이들이 더 이상은 견디기 힘들어진 내면의 압력이 공황장애와 같은 신경증으로 터져 나와 간절한 촉구로 호소하기 전까지는 그 달콤함으로 자신을 채우는 것으로 만족하며 스스로를 속여내는 데 능해진다.
세상에 종속된 자로서 세상을 위해 일하고 노력한 대가로 얻어지는 결과에 급급하며,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충만감을 얻는 것이 행복이라는 도파민을 깨우고 유지하는 유일한 활로가 되어버리는 것을 경계하지 않도록 속이는 주류를 거스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내게 절대무변의 가치를 위한 방향성이 무엇인지 알고 나아가는 것이 거시적으로 전체를 조망하는 시야에서 진정으로 빛나는 미래를 위한 대비가 되는 길이라는 진실을 땅 끝 지하 깊숙이 숨겨둔 채 스스로 속여왔던 자기기만은 언제라도 내면에서 폭발할 준비가 되어 있다.
과연 우리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순수한 기쁨으로 몽상적 기질 가득했던 어린 시절에도 쉽게 이기적인 탐욕을 기준 삼아 세상이 유도하는 것에 대한 충성심을 진정 나를 위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었을까? 적어도 오직 나 자신의 타고난 개성에서 빚어진 자아 방향을 위한 보람과 충만으로 몰입하는 밤을 지새우던 과거의 나는 그렇지 않았다. 어느 순간 그 열정이 자기애의 냉소적이고 오만한 게으름과 타협하여 무기력으로 꺾여 버리기 전까지 말이다.
이제 나는 다시 그 어린 시절의 나에게 다시 배우는 성장을 하고자 한다. 내 남은 생에서 설령 단 하루의 물리적 시간을 허락받게 되더라도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섭리에 대한 감사로 어떤 고난에도 절대 미래의 불운과 불행을 의심하는 일 없이 순수한 믿음과 기대가 충만한 시간으로 깊이 몰입할 수 있다면 도대체 어떤 불만과 부족함을 느끼겠는가? 게다가 어린 시절의 나는 아직 자기 욕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한 근면성실'의 미덕의 중요함에 대해서는 미처 무지했다면 지금의 나는 이미 그 가치와 방법에 대해서도 가르침 받는 중이니 더욱 단단하게 무장될 여지가 용기와 인내를 실어다 준다. 그러하니 성장하는 법과 방향성을 잃어버리거나 혹은 잊어버리지 않도록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의 뜻에 나는 무한한 감사와 겸손한 기쁨으로 순종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