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적 교만이 부르는 불행
섭리로부터 허락된 내 고유의 개성과 특질 안에서 하나님의 뜻의 일부가 되는 독립적 중심과 소신을 구축하는 법을 연습하고 내적 자존을 키워가는 과정에서 타인 혹은 세상과 충돌하게 될 때 그 불편감에 지혜롭게 대처하는 법은 내게 아직 생경하다. 피곤한 일은 그 가치와 경우를 따지지 않고 되도록 기피하던 기존의 내가 취하던 처세는 일단 상대와의 적정거리를 설정하고 그 사이에 절대 뚫을 수 없는 벽을 세운 후 안전한 바리케이드 안에서 다양한 맞춤형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것으로 상황을 속이고 발을 빼는 것이었다. 겉으로는 유연하고 편안한 사람처럼 보였을지 모르겠으나 실상은 굉장히 융통성이 없고 고지식한 내면의 날 선 공격성을 감추기 위한 일종의 허세로, 나를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데서 오는 억압을 보상받기 위해 뒤에서는 순수한 비판 의식을 넘어선 신랄한 냉소와 비난의 폭격을 퍼붓고 종종 악랄한 글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한 이중적 처세술은 언뜻 내게 자존적 만족감과 대외적 유리함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주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기에 점점 유용하고 익숙한 메인 도구로 자리 잡아갔다.
더 늦어버리기 전에 고맙게도 나에게 경고의 알림으로 촉구해온 내면의 서비스 덕분에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과 남을 속이는 것만큼은 철저하게 봉인당한 나는 이제 편의와 쾌적을 챙기기보다는 불편하더라도 신념을 굽히지 않고 투쟁하기를 선택한다. 하지만 생전 반항이라는 것을 해봤어야 말이지. 조건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신랄한 냉소와 비난의 기분, 행동의 기준을 찾지 못하는 혼란, 상대에 대한 의심과 불신 등 많은 것들이 지저분하게 뒤섞여서 개인의 영광을 위한 투쟁이 아닌 하나님을 위한 투쟁, 미움이 아닌 사랑을 담아낸 투쟁이 되게끔 하는 법은 낯설고 어렵다. 하지만 선각적 가르침을 통해서 사실상 모든 문제의 원인은 내 안에 있음을 깨닫고 본질적 사안들은 결국 '내가 어떻게 여겼고 변화했느냐'를 고뇌하여 자신의 내부에서 '내적인 교만'을 견제하는 것에서부터 진정한 투쟁은 시작된다는 핵심을 깨닫게 되었다.
충돌의 불편감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꺾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단단하고 견고한 신념을 허세와 속임수 없는 솔직함으로 만들어가되, 그 방향성 안에서 몇 가지 원칙을 정립해보았다.
첫째, 내 입장의 유리함과 자기애의 충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한 신념이라는 확신이 들도록 자극이 주는 불편으로부터 내적인 교만에서 온 감정과 생각을 변별해 낸다.
둘째, 하나님께서 지으신 또 다른 개성인 타인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상대의 내면을 폭넓고 깊게 이해한 후 공감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을 거쳐 내 독단적 입장에 치우치지 않도록 신중하고 객관적으로 조망한다.
셋째, 상기 두 가지 노력에 기초하여 판단하고 행동했다면 상대방의 기분, 반응, 이후 발생하는 반향 등 모든 현상적 결과에 대해서는 어떤 집착도 욕심도 버리고 하나님께 맡긴 후 흘려보낸다. 왜냐하면 내게는 필시 이 염려로 소모되는 에너지를 더 우선적으로 써야 할 다음 일이 있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넷째, 설령 이 모든 과정에서 충분히 만족스럽지 못한 자신을 보더라도 더 나아짐을 위해 깨달아야 하는 타이밍이었음을 인정하고 자의식 과잉의 소모적인 날을 세우지 않으며 스스로에게 관대할 줄 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합일된 뜻과 소명 아래서 함께 동행하며 나아가는 대상일수록 그 관계성 속에 는 감사하게도 보다 큰 믿음이 허락되어 있기 때문에 노력의 과정에서 더 구체적이고 다양한 소망을 품고 그에 결부된 사랑의 가능성을 배우는 기쁨을 누리게 되리라는 것이다. 내게 발생하는 그 모든 상황은 하나님께서 이미 배비해 두신 거대한 계획 아래 완벽한 '필연성' 속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나는 올바른 가르침을 통해 적어도 머리로나마 어렴풋이 깨닫고 있으니 참 감사하고 다행이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