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ravis and Johnnie Jan 20. 2023

다양한 세상에 대한 믿음

개인의 편의를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는 용기

  하나님께서 이 차원을 설계하신 본질적 섭리를 조금이라도 깨우치고자 항시 깨어 있기 위한 노력을 하기 이전에는 절대적이고 숭고한 그 무엇을 추구하는 인간의 변하지 않는 꿈이 다양성으로 함께 존립하는 것에 대한 기원적 난제를 가지고 고민해 본 적이 없다. 기본적으로 각양각색의 다채로운 특질들이 얽혀 들어가서 형성되는 현상들에 매료되는 나는 사람의 개성을 억압하는 방식이 아닌 한 군집적 차원이든 개인적 차원이든 현존하는 대부분의 종교적, 문화적 양식을 충분히 존중할 요량이었고 심지어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하거나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마다하지 않는 성향이었기 때문이다. 

  외려 믿음을 가지게 되고부터 선각적 지혜로 신앙의 어버이 역할을 수행하는 올바른 교회로부터 전수받은 방식대로 성경 말씀을 이해하고 따르면서 이전에는 지극히 열린 마음으로 대하던 많은 것들에 대해서 의구심을 품거나 불안감을 느끼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여 한동안 많은 통증을 불러일으켰다. 별다른 고뇌 없이 내 마음 편하고자 손쉽게 복사된 믿음의 양식은 내 안에서 '기독교적인 기조와 색채를 띤 모든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것', '기독교적이지 않은 모든 것은 이단적이거나 올바르지 못한 것'으로 잣대를 내리고 냉정한 분류와 절삭을 단행해야 할 것 같은 강박으로 소위 '흑백논리'를 강화시키는 오류에 빠져들 뻔한 것이다. 그래야 내가 세상 속 잡스러운 많은 것들은 깔끔하게 무시하고 올곧게 정답만 쏙쏙 골라 믿으면서 이 한 몸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렇게 선민의식과 다를 바 없이 교만한 편 가르기는 낯선 땅에 발을 들이고 염려가 많아진 믿음의 초보자를 유혹하고자 새롭게 치고 올라온 또 다른 이기심과 자기애의 얼굴이었기 때문에 세상 구석구석 다양한 개성을 포섭하고 소통하는  데 최선을 다하는 역할이 허락된 내 성정이 억압되는 것을 느끼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물론 고통에 흔들리는 사람의 나약하고 불행한 영을 마치 흡혈귀처럼 붙들고 빨아들이며 잇속을 채우려고 하는 이단적 교리는 칼같이 분별할 수 있어야 옳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진실되게 소통하고자 하는 노력을 애정과 정성으로 기울일 때 조금씩 확고히 굳어지는 중심에서 나오는 지혜가 어리석음을 가려내고 정제해 가는 싸움에서 믿음직하게 진두지휘를 맡아줄 것이다. 하지만 각 도처에서, 한 사람의 상상력으로는 전부 알 수 없을 정도로 무수한 경로와 깨달음을 통해 진리를 향해 나아가고자 애쓰는 모든 영혼의 고군분투와 그 결괏값이 지니는 옳고 그름의 판단적 주권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가지고 계시므로 내가 인간적 명철함에 의존하여 감히 판단하려 드는 순간 이는 미처 책임질 수 없는 교만의 악덕함이 된다. 


  진리를 향하는 과정의 다채로움은 수천수만의 믿음이 존재하는 만큼의 수대로 형형색색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완전하게 동일한 영혼을 복제하여 두지 않으신 데는 그에 상응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는 곧 하나님께 부여받은 각기 영혼의 색깔대로 전부 다르게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발견하고 모색하여 맺어갈 것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라 여기는 것이 합당하다. 마치 자기 극복을 통해 한계점을 넘어서는 시간 속에서 발굴되어 채집되는 내적 자존감은 공유 재산인 양 상부상조의 품앗이가 될 수 없고 진리로 향하는 믿음 또한 공동의 창고에서 아쉬운 대로 빌리고 갚고 서로 나눠 쓸 수 없듯이. 

  어떤 개성에 오롯이 담긴 출력의 형태 너머 본질을 어떤 선입견도 편향인지도 없이 순수하게 바라보는 연습을 하지 않으면 진실은 발견되지 않고 소통은 불능으로 치닫는 경우는 허다하다. 도무지 말이 안 되는 거짓말 같은 논리 속에 본질은 숨어 있기도 하고, 가장 합리적인 명분적 논리에 본질의 자취는 온데간데없을 수도 있다. 엉망진창이고 천박한 어투의 논조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매복해 있을 수도 있고, 어떤 박학다식으로 무장된 명민한 논조는 전혀 사랑을 위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을 직접 알아가기 위해서 이토록 재미있고 다양한 생태계는 마련되었고, 병렬과 중첩의 끝을 알 길이 없는 숱한 '관계성'이 허락되었다. 하나님께서 직접 지으신 이 생태계를 이해하고 조망하는 것을 통해서 그 일부를 구성하는 나와 세계와의 관계성을 실증해 가는 것이 우리의 인간됨에 공히 맡겨진 중책이리라. 

  내 영혼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생각해 본다. 미지에 대한 호기심과 추구가 막연하나마 끊이지 않는 내 개성의 범주와 과정에 종내 어떤 표상을 허락하시려나. 그 길은 결코 쉽지 않겠으나 선각적으로 대물림된 '전형성의 표상'과 내가 스스로 발굴한 '개인성의 표상'은 어느 쪽도 공평하게 나의 내면에 새겨져 있고, 섭리를 이해하고 교통 하고자 노력하는 데 있어서 앞으로의 변화를 든든하게 지원하는 양손의 도구가 되어줄 것임은 분명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결핍, 한계, 갈망, 억압의 알고리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