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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avis and Johnnie Jan 11. 2023

결핍, 한계, 갈망, 억압의 알고리즘

# 결핍, 한계


  '한계'라는 것의 진짜 정의와 개념이 무엇인가. 한계를 넘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외적으로 쟁취될 수 있는 고되지만 영광된 그 무엇을 위해 내게 주어진 능력 이상의 것을 노력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세상의 프레임에서 학습된 대로 혹은 절대다수가 향하는 드넓은 고착의 길로 유도되는 대로 스스로에 대해서 규정하여 만들어낸 '불가능'에 대한 믿음을 뛰어넘는다는 의미가 된다. 왜냐하면 우리 대다수의 내면에는 '믿지 않음'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 차 있기에 진실로 필요한 믿음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일세를 풍미한 복서 마이크 타이슨은 불행하고 혹독한 환경에서 나고 성장했다고 한다. 아마도 대다수 슬럼의 아이들의 운명이 세상에서 내던지는 대로 흘러가버린다는 것과 자신도 그중 한 명이 될 수밖에 없다는 냉혹함 속에서 성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마음 한 구석에서 그러고 싶지 않다는 강한 반항심을 가졌고, 그 마음이 운명에 닿아 그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아마 그 순간 그의 마음에서는 강렬한 '소망'이 품어졌을 터이다. 소망이란 현재의 내게 결핍되어 있는 그 무엇 때문에 좀처럼 손에 닿지 않아 목마르도록 희구하는 갈망의 성격을 띤 것이 되지 않았겠는가. 손쉽게 충족될 수 있는 것이라면 굳이 소망이라고 이름 붙이지는 않는다. 따라서 소망 앞에는 반드시 두 가지 갈래의 길이 놓여 있다. 


  하나, 소망의 실현에 자신을 투신하기 위한 가능과 변화의 길. 

  둘, 결핍의 결과인 억압이 유도하는 불가능과 고착의 길.


  또한 변화의 길을 지원하는 재료는 '독립'과 '사랑'을 위한 투쟁의 공식이며, 고착의 길을 지원하는 재료는 '이기심'과 '자기애'의 공식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나는 마이크 타이슨의 내면을 심도 있게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한 노력을 해 본 적이 없어서 그가 선택한 전자의 길에서 일구어낸 공식이 내게 어떤 감화력을 지니고 있을지 아직 간파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가 환경적 불운함과 신체적 악조건을 딛고 모종의 한계를 돌파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한 사람이라는 것만큼은 추측할 수 있다. 한번 제대로 각인된 역량은 그 사람을 근본에서부터 변화시킨다고 한다. 또한 나를 집어삼키려는 어떤 유혹이 침범한다 할지라도 이미 얻어진 역량의 바탕 위에서 결코 굴복하지 않고 본래의 중심을 회복할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을 곧 '자기 정화', '자기 조정'의 기능이라고 한다.

  이러한 역량의 공식은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한계를 넘어본 사람의 영혼에만 아로새겨지는 어떤 특별한 형태, 색깔, 향기, 문장(紋章)이 표현하기 어려운 아우라가 되어 풍겨 나오는 것을 우리는 어떤 에너지로 감득하는 것이지 않을까. 믿음의 길에 있어서 그 힘은 가장 낮아진 자의 초연한 사랑과 선각적 지혜의 아우라가 되어 자신의 결핍됨을 오만과 게으름으로 속이는 것 밖에는 몰랐던 자들을 이끄는 빛이 된다. 




# 갈망, 억압


  '결핍 ―한계 - 갈망 ― 억압'의 인간적 알고리즘. 결핍되지 않은 채 태어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는 곧 억압을 만들지 않을 수 있는 인간이란 성립되지 않는다는 논리를 증거한다. 나는 현재 억압에 대해서 올바르게 배울 수 있는 값진 기회를 얻고 있음과 동시에, 나의 억압과 관련하여 다양하고 입체적인 오거나이징의 기회가 마치 서로 의논하고 짜인 것처럼 필연적인 타이밍으로 마주하고 있음에 감사하고 있다. 몇 가지 그 중간 정리를 서술한다.


  하나, 억압이란 내 안에 결핍된 무엇에 의한 한계점과 그 인간적 불완전성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성되는 갈망에 의해서 상충하는 힘의 압력이다.

  둘, 내면 깊은 곳 무의식에서 품어지는 근원적 갈망은 사회로부터 흔하게 학습된 갈망과는 달리 내 의식에서는 현재 내게 어떤 억압이 발생하고 있는 줄 미처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셋, 갈망은 허황되고 탐욕적인 것, 세상 속 개인의 유리함과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궁극의 가치에 대한 추구의 방향으로 설정되어야 옳다.

  넷, 개체의 안위를 위해 작동하는 이기적 본능은 결핍을 보상하고 한계점에 대한 투쟁을 회피하고자 여러 방어의 공식을 만든다. 

  나의 경우 일차 공식으로 (A) 변명, 합리화, 책임 전가, 게으름, 외면, 냉소, 비난, 교만을 만들었고, 양심 상 일차 공식으로 해결이 되지 않는 경우에 이차 공식 (B) 자격지심, 피해의식-가해의식 등의 오류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기심에 의한 방어기술은 그대로 나의 본질적 가능성을 공격하는 억압이 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인간의 본질적 결핍이란 크게 두 가지 방향성이 있어서 첫째는 내게 본디 주어진 개성의 정신이 온전한 자유로 독립되어 있을 수 있는 <자존적 힘>이고 둘째는 내가 전체 우주의 섭리 일부를 구성하는 요소가 될 수 있도록 무수한 직 ∙ 간접적 관계성이 허락된 것에 대한 존중과 책임에서 오는 <사랑의 힘>이다. 불완전하기에 완전함을 추구하는 것 또한 인간의 본능이기에, 이 두 가지 태생적 결핍 앞에 선 사람은 갈망을 품고 두 갈래의 길에서 선택을 종용받는다. 소망이 이끄는 대로 한계점을 넘어 변화하고자 노력할 것인가, 억압의 공식이 이끄는 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고착할 것인가. 

  물론 머릿속에서만 그리는 얄팍한 이상주의를 초월한 실존적 답은 정해져 있다. 내 두 눈앞을 흐리고 어둡게 가리도록 드리워진 억압의 공식을 걷어내고 '깨어 있음'을 통해 궁극의 가치를 희구하며 그것을 실증하는 존재가 되는 운명을 내게 주어진 힘과 시간이 닿는 지점까지 좇아야 본질적인 행복과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 인간의 정체성이라 여기는 까닭이다. 우리가 마지막 순간까지 '근면성실'을 한시도 놓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결핍이란 스스로 부단히 고뇌하고 깨달은 바를 직접 실행하지 않으면 도저히 채워지지 않는 구멍이기 때문이다. 또한 아무리 오랜 노력을 지속해 왔어도 실행을 멈추는 순간 얼마든지 다시 고착에 미혹될 수 있는 나약함 또한 인간의 불가피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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