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행이라는 이름의 첩자
'시민(citizen)'이라는 단어는 단지 한 국가 사회의 일원으로 그 나라 헌법의 권리와 의무를 가지는 사람이라는 사전적이고 표면적인 정의 이상의 풍자적 뜻이 내포되어 있다. 현상 너머 이면에 있는 본질을 추구하는 뛰어난 통찰력을 지닌 여러 작가들은 공통적으로 이 '시민'이라는 뜻이 가지는 비극성을 해학적으로 희화화하며 그 부조리를 원거리에서 분리해서 독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국외적 시야를 구분 짓기 위하여 그 반대 편에 '황야의 이리', '들쥐', '벌레', '지하 생활자', '아웃사이더', '광인', '이방인', '백치', '광대', '위버멘쉬', '유로지비' 등 여러 메타포를 활용한다. 일찍이 내가 사랑과 존경이 한가득 어린 음성으로 입술에서 자연스러운 울림으로 부르던 애틋한 비전형의 이름과 대상들, 하지만 오직 비밀스러운 상상 속에서만, 왜냐하면 실제 상황에서 그들은 지극히 위험한 존재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나도 내 한 몸 지킬 줄은 알아야지. '사회성'이라는 유전적 힘 덕분에 내 신변에 유리한 게 무엇인지, 독립적 개성과는 다른 노선에서 동시에 학습해가는 것이 죄는 아닐 것이라고 믿는다면 꺼림칙할 것은 없다. 여러분, 종에게도 유불리라는 게, 아니지, 시민에도 유불리라는 게 있답니다, 어차피 프레임 속 개념을 소비할 요량이라면 기왕 유리한 시민의 위치를 선점합시다, 뭐 이와 비슷한 방어기제일 것이다.
물론 이 모든 웃기고 슬픈 개념적 비틀림은 문학 따위에서나 성행하는 놀음으로 현실에 충실한 시민들에게는 난센스와 같은 이야기이다. '나야 종이 아니고 종일리 없으며 종으로 살고 있지도 않은데 종이라고 생각하여 소유된 존재임을 인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라고 묻는 순박한 물음표는 마치 상연되기 전에 소실되어야만 했던 극본처럼 없기 위해서 있는 희극이다. 물론 희뿌옇고 탁하게 경화된 내 눈동자 안에서도 예외 없이 마찬가지로. 하지만 내 안에 물음표가 살고 있었다는 것을 자각한 후 나는 그것을 무대에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인류가 집단적으로 모여 살기 시작한 이래 마치 신화라도 되는 것처럼 고유하게 이어져 내려온 이기적 프레임 속에 걸린 최면 같은 암시가 무참히 깨져버렸기 때문이다.
개발자에 의해서 정교하게 프로그래밍된 AI는 입력된 정보 외의 가능성에 대해서 인지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이따금 주어진 시뮬레이션 그 바깥을 기웃거리는 극소수의 변이체가 나타난다고 들은 바 있다. 과연 나를 가두고 있는 것의 실체는 무엇이며, 내게는 무엇이 주어진 틀을 깰 수 있도록 각성을 돕는 최고의 기폭제 역할을 할 수 있는지 그 비좁은 통로를 발견할 수 있을까?
우리의 개념을 지배하는 유행이 돌고 돌며 내면에 파고들어 하나의 공식으로 심어지는 과정은 흔한 첩보물보다야 치밀하다. 프레임이 제시하는 가변적 유행에 따라서 삶의 목표를 바꿔가면서 설정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자 지혜라고 믿게끔 설득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결정권이 없는 일에 대해서 결정권이 있다고 믿는 순진함은 인간의 사회 심리에 통달한 이들에게는 최고의 먹잇감이기 때문이다. 그 순진함의 이면에는 자신이 프레임 안에서 이미 점유한 것을 가장 소중한 것이라 여기는데 손쉽게 미혹되고, 그것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잔혹해질 수도 있는 인간의 나약함과 불완전성이 매복하고 있다.
한편 스스로 시스템이 제공하는 프레임의 홍보와 마케팅에 쉽사리 속지 않는 현명한 주체임을 과시하는 것이 본질적 핵심과는 무관한, 반항적이고 의심 가득한 개인의 취향을 뽐내는 정도에 그친다는 것은 비극적인 일이다. 비주류에 심취한 사람이 주류를 역차별하는 경우도 결국 이기심이 만들어낸 프레임의 사고방식 안에서 이루어지는 지엽적 유행의 한 갈래에 불과하다. 애당초 카테고리를 분류하는 기준이 잘못된 것이다. 독립적인 자기중심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메이저한 시류와 마이너한 시류를 따지는지 입증하는 지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보편과 개성의 문제를 떠나서 깨어 있고자 이미 내부에 심어진 첩자에 대한 극복의 의지가 있는가 없는가, 그것만이 유일한 기준이 된다.
프레임의 유행을 좇는 목표 의식과 유리함의 개념 안에서도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는 고집, 누릴 것은 누리고 추구할 때는 추구하겠다는 열망은 탐욕적이고도 나이브한 장밋빛 꿈으로 남을 뿐이라는 것을 나 자신의 사례를 통해 잘 안다. 인간은 각자에게 허락된 본래의 영혼이 띠는 영롱한 색채를 되찾기 위한 삶을 살아나가지 못하면 반드시 불행해진다는 것 또한 스스로 직접 겪었다. 우리는 암흑 속에서 반짝이는 일원의 빛을 찾아야 하고, 반드시 찾아갈 수 있도록 필연성에 의해 설계된 세상을 살고 있다. 구태여 고통으로 지어진 억압과 부조리의 생태계 안에서 부자유한 종의 운명이 내정된 차원임을 믿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속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힘으로 스스로의 한계를 딛고, 물리적 차원을 뛰어넘어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창조주는 거대한 확신으로 굽어살피고 있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