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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avis and Johnnie Dec 31. 2022

주제 파악과 우선순위

: 가지고 있지 않은 것에 집착 VS 가진 것에 집중

  최근 내게 발발한 몇 가지 공통된 자극들에 의해서 스쳐 지나간 생각이 있다. 어느 때부터인가 타인의 조건과 나의 조건을 비교하는 습관이 들어버린 것으로부터 나는 자격지심 혹은 피해의식을 만들어왔던 것 같다. 그 비교의 대상이 세상으로부터 일파만파로 끝없이 밀려들어 파급되는 것을 통제할 수 있는 독립적 힘은 없지 않다. 하지만 내 좁은 삶의 반경에서 허락된 국소적 관계의 실시간에서 직접적인 영향력을 받을 수밖에 없을 때 내게 없는 것을 가진 자에 의해 내 입장이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이 느껴질 때 혹은 나의 불리함이 공정하게 안배되지 못하는 상황을 부조리하게 느끼는 울분이 자존적 억압으로 쌓여간 것이다. 

  그런데 이 억압을 뭉뚱그려 느끼지 않고 그 성분을 잘게 분해해 보면, 사실 내게 정말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상대방의 타고난 선천적 조건도 아니요, 그가 나름의 노력으로 구축한 자격에 대한 부러움과 질투도 아니요, 그가 자주적으로 생성한 자존의 공식이 가지는 역할성과 대비하여 공히 텅 비어 있는 자신의 내면이었다. 내게도 분명 뭔가를 만들어 보라고 주어진 나만의 재료가 있었는데도 그것의 가치를 활용하고자 충분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그래서 깨닫게 된 것은, <사람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서 억압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제대로 쓰지 못했을 때 억압이 생긴다>는 사실이다. 

  내가 사랑하는 프란츠 카프카의 생은 짧았다. 지금 내 연령에서 앞으로 소정의 여명만이 추가로 허락된다면 카프카와 동일한 시점에서 곧 이 세상을 떠나야 할 정도로 그는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했다. 그는 살아생전에는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무명 중 무명의 작가였다. 그의 사망 이후로도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그의 글에서 가치를 발견한 사람들에 의해서 그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세기의 작가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한편 그는 짧은 생의 시간 동안 글을 쓰는 행위에 영혼을 팔기라도 한 것처럼 끊임없이 내면을 기록했다. 공식적인 창작 소설뿐만 아니라 수많은 소품, 스케치, 일기, 편지글을 남겼다. 그는 형편이 넉넉지 않았기 때문에 오전에는 일을 해야 했고, 오후부터 때로는 밤을 지새워서 글을 썼다. 그런 그의 고질적인 불면증은 글 쓸 시간을 확보해 주는 행운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물론 카프카에게도 꿈은 많았다. 천성에 맞지도 않는 일을 그만두고 고향을 떠나서 모든 작가의 선망인 파리에서, 적어도 베를린에 정착하는 꿈, 결혼을 하여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꿈,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는 서럽고 애매한 정체성을 극복하고 사교의 중심에 선 인물이 되는 꿈, 학업에 정진하여 누구에게도 무시받지 못할 만큼 뛰어난 엘리트 지성인이 되는 꿈, 병약한 자신의 체력을 강인하게 단련할 수 있는 길을 떠나 체육인이나 탐험가가 되는 꿈 등. 

  만약 카프카가 그 모든 꿈을 이루고자 동분서주하여 백방으로 노력했다면 그를 불행하게 만든 여러 환경적 조건을 극복하고자 했던 불굴의 의지는 비록 외견적으로 칭찬받아 마땅할지 모르나 그 대신 그가 남긴 모든 작품들은 현재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생에 걸맞도록 허락된 시간과 에너지의 한정된 양을 제 욕심대로 조정할 수 없는 노릇이니. 

  카프카는 본능적으로 '주제 파악'을 매우 잘했다고 생각한다. 이 주제 파악은 각 개성의 내면에게 합당하도록 주어진 순수한 임무를 온전히 충족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도 자신의 사뭇 초라했던 생을 돌아보며 수없는 불만, 박탈감, 후회, 피해의식, 자격지심 등 여러 억압적 요소가 있었을지 모르나, 적어도 자신의 자아 방향성에 꼭 맞는 일을 자기가 지금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한정된 시간과 에너지 안에서 한시도 멈추지 않고 최선을 다해 이어갔다. 그렇게 결과를 목표하지 않는 과정에 몰입하는 법을 체득해 갔고, 덕분에 제 아무리 부정적인 자기 평가가 방해를 할지라도 그조차도 감싸고 보듬을 수 있는 모종의 근원적 만족감과 뿌듯함이, 내적 자존감의 충만을 느낄 수 있었으리라. 

  카프카는 마지막 순간까지 글을 썼는데, 그 글에서는 죽음을 목전에 앞둔 폐병 환자의 미래 기대가 희끄무레하게 투영되어 있다. 만약 그가 객기와 허영이 가득한 외적 자존에 사로잡혀 자신을 드높이는 시나리오에 대한 탐욕으로 고군분투하는 인간이었다면, 죽음 앞에서 섰을 때 '내가 해야만 했던 진짜 할 일을 하지 못했다'는 억압이 터져 나와 공허와 두려움의 깊은 나락으로 추락했을 것이다. 그는 다른 누구도 할 수 없는 독창적인 방식으로 심혼의 내면을 표현할 수 있는 역량과 함께 그 책무를 허락받았고, 우선순위에 철저하게 충실했다. 누군가의 말씀처럼 믿음의 가성비가 좋지 않은 둘째, 셋째, 넷째 꿈들은 고이 접어두었다. 

  누구라도 당장 내일 닥쳐올 운명조차 알지 못한다. 나는 아마 적어도 카프카보다는 오래 살게 될 거라고 확고하게 말해주는 이는 이 세상에 현존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내게 어떤 운명을 배비해두고 계실지 털끝만큼도 예측할 수 없다. 그 섭리의 지배 하에서 한정된 생을 허락받은 우리들이기에 미래에 대한 염려는 집어치우고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하여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최선의 그 무엇을 최고에 대한 이상주의나 정답주의에 경도되어 유보하거나 홀대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자기 영광을 위한 시나리오에 빠져드는 지름길이다. 당장 내일 생이 멈출지도 모른다는 섭리를 받아들이고 미래 기대를 품는 행복한 바보가 어디 있겠는가 싶지만 나는 그런 사람들을 알고 그들을 섬기며 따라간다. 

  나는 이미 받을 만큼의 은사를 다 받았다고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내뱉었으니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제 영혼의 꼴에 가장 잘 어울리는 복을 선사해주셨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고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에서 올바른 일부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하는 자의 마음에 깨우침과 행동의 계기로 작용할 역사가 허락되는 것이리라. 내가 주인이라도 가진 것의 기쁨과 감사를 알고 맡은 바에 근면성실한 일꾼이 필요하지, 가지지 못한 것의 불리함을 한탄하거나 가지지 못한 것을 꿈꾸느라 게으름에 빠져 있거나, 가지지 못한 것을 채우느라 정작 가지고 있는 것을 방치하는 일꾼은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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