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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avis and Johnnie Feb 21. 2023

소망과 행복의 분열

'이상'이라는 이름의 개성에 취하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 그리고 방향에 대한 상념에 잠겨 있는 상태에서 오늘의 글쓰기를 하면서 내가 쓰고자 하는 글에 추진의 기쁨이 아닌 두려움의 허상으로 작용하고 있는 '이상'이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경제력이나 명예욕 등 글을 통해서 실현할 수 있는 현실적 자기 영광은 전부 배제한다 할지라도 나 스스로를 충족시키기에 모자람이 없는 개인의 이상이 내 안에서 생명력을 가지고 숨 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보통 내게 입력된 모든 감각과 심상, 오성을 아우른 영감의 양상으로부터 결정된다. 자고로 느낀 것이 있다면 표현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일 터. 글이든 영상이든 흉금이 이끌리는 타인의 출력물을 많이 접할수록, 모종의 아우라가 감지되는 사람과 많이 접촉할수록, 세상을 구성하는 요소들에 깊은 관심을 가질수록, 내가 더없이 유의미하게 살아 있는 유기체라는 확신을 불어넣어 주는 그런 예감들이 허락될 때, 나는 까마득한 신비를 어떻게든 실제적인 것으로 표현하는 구조화에 도전하고 싶어 진다. 물론 스스로 가장 설득적이고 효과적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방식을 모색하고 고뇌하여 그 출력이 기어이 만족스러운 '가능'으로 기운 듯한 느낌이 들 때, 보람과 충만감은 더없이 커질 것이다. 그것이 내가 품고 있는 '갈망에 대한 이상'이다.

  하지만 현재 그 도전은 내게 자연스럽지만은 않기 때문에 일단 '직면'의 대상이 되어 있다. 그렇다면 거기에 어떤 이상을 빙자한 허상의 탈이 두려움이라는 이름으로 내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리라. 그 허상의 이름은 '행복에 대한 이상'이다. 나는 나 자신이 기쁨과 충만을 느끼는 글을 잘 쓰지 못해서 실망하여 좌절할까 두려워한다. 나의 행복한 미래를 결정하는 데 있어 가장 견디기 힘든 일인 까닭에. 그런데 그것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가공의 미래를 염려하는 상상에 불과하니, 판에 박힌 이해 범주에서 행복을 성화독촉하는 공식도 엉뚱한 외부에서 주입된 것이 틀림없다. 물리적 한계 속에서는 온전히 규정될 수 없는 행복의 엔트로피가 주입되는 경로는 내 안에 연결된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데, 나는 가장 뻔한 법칙에 의존하는 것으로 얻으려 하니 소모적인 염려를 부른다. 시간 개념이 없는 내면에 힘입어 물리적 시간의 흐름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 '몰입된 현재'를 통해서만 입을 벌리는 차원의 행복이 흘러들어온다. 상상이 아닌 몰입을 통해서 행복을 알아 가는 것이 나의 첫 번째 반대증거이다. 


  한편 나는 갈망이든 이상이든 골치 아픈 놈들은 마치 내 어린 시절처럼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귀여웠던 몰입을 방해하기만 하는 불한당으로 간주하여 소거한 후, 시간을 처음으로 되돌려 회귀된 천진난만성으로 글을 써야 하는가 생각해 본다. 그것은 어쨌든 조급과 염려 견제를 일 순위로 생각하는 내게 꽤 그럴듯하고 설득적인 사고방식처럼도 보인다. 어릴 때 했던 몰입의 기쁨에는 어둠이 깃들어 있지 않고 오직 빛만이 넘쳐흐를 뿐이었는데, 어쩌면 그것은 아직 자아가 미처 전부 자라지 못한 상태에서 꽃봉오리가 피우지도 못하고 좌절하는 일이 없도록 보호하고자 허락된 한시적 특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떤 대상이든 빛을 받아 반짝이는 부분이 있으면 그 뒤에는 반드시 그림자가 생겨 붙어 있다는 사실을 아직 뼈에 스미도록 깨닫지 않아도 되는 순진한 때 말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아이가 아니기에 그림자까지도 영위의 재료로 삼을 수 있는 어른의 타이밍이 허락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다시 어린 시절로 퇴행한다고 억압이 해소될까? 되려 현재 내게 부여된 위치를 부정하며 새로운 억압이 되는 것은 아닌지?

  갈망이라는 이름의 이상도 예외 없이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이상은 내가 현실적인 쾌적함에 타협하지 못하도록 내 등을 떠밀고, 혼란의 통증을 야기하며 그로부터 무엇이든 모색하도록 고뇌를 유발한다. 때로 이상은 내가 마음에도 없는 겸양과 겸손을 핑계로 해볼 수 있는 것을 지레 포기하여 억압되지 않도록 추진의 힘을 실어주고 끝내 충만함의 기쁨과 영위의 조각을 슬쩍 보여준다. 그 재미와 희열의 맛은 가히 중독적이어서 여전히 이상의 눈치를 슬슬 보면서도 나는 오늘도 입꼬리가 움찔거리는 것을 느끼며 글을 쓰고자 자동적으로 책상 앞에 앉아 머리를 굴린다. 내가 할 수 있을지 없을지 그야 모르겠으나 어쨌든 쓰고 싶은 것이 참 많구나, 주제도 모르고 무책임한 꿈이 넘치는 대가리 꽃밭의 인간이여, 너는 정녕 실용적으로 바뀔 수 없는 것인가.

  하지만 이상에는 죄가 없다, 이상의 위용에 지레 겁먹어 도전할 수 있는 일을 회피해 온 것이 나의 죄일 뿐. 이상이 억압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이상을 누릴 자신이 없어 부담감에 외면하고야 만 나에게 내면은 실망했던 것이다. 용기를 내어 내 이상에 최초로 직면했던 과거 어느 날을 기점으로, 여전히 나는 평생을 쫓아도 이상을 따라잡을 수 없을지 모른다. 아니, 아무래도 실현의 가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 초유의 비굴한 사태에 자기애가 발동하여 염려하지만 않는다면, 순순히 인정하고 누릴 수 있다면, 뭐, 그것도 꽤 괜찮을 성싶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는 것이 상책인 것처럼, 그 가치를 포섭하여 창조적으로 활용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분명 마지막까지 이어질 끝없는 혼란을 내 본연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고 스스로 그 분야의 특기생이자 대명사이며 아이코닉한 사람이 되자고 마음먹지 않았는가. 내 혼란도 이상도 나를 괴롭히는 동시에 기쁨을 주는 내 개성의 일부이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방향성이기에 사랑으로 영위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하나의 갈망 즉 소망의 초점이 될지니. 어차피 나를 애써 아껴둘 이유가 없다면야 그 나머지는 믿음으로 운명에 맡겨버릴 밖에. 하나의 이상 안에서 과정의 '갈망'과 결과의 '행복'을 분리한다. 구태여 행복의 조건을 계산하지 않고 절대 멈추지 않는 자, 그 자가 행복을 얻을 테니 말이다.


  이상을 지키느냐 버리느냐, 아 그것이 문제로다, 엉뚱한 정답주의에 빠지지 말고, 시야의 차원을 평면에서 입체로 뒤집는다. 마치 예수님의 사랑을 닮는다는 것은 평생을 바쳐도 실현 불가능할 꿈이지만 조금이라도 그에 가까워지고자 노력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처럼. 이상을 좇는 행위 그 자체가 순수한 과정을 즐기는 현재 몰입의 에너지가 될 수 있으리라고 아마도 과거의 나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이상을 반영한 글쓰기 직면을 통해서 입체적인 사랑을 체득할 수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 곧 나의 두 번째 반대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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