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각을 현재로부터 지배한다는 것
생각을 현재에 둔다는 것은, 현시성으로부터 가장 창조적으로 생존하는 자아가 시간의 흐름이라는 물리성과 가당하게 합일되어 지나고 있음을 과시하여 실증하는 행위이다.
몸은 현재에 두고 있을지 모르나, 내 인지와 사고가 과거에 지배당할수록 그 목적성이 전체적 섭리의 보편타당성과 상치되는 불순함으로 흐르기 쉽다.
지나간 시간은 기억이라는 각인의 형태로 내면에 잔류하고 정보화되었을 뿐, 이미 가능과 불가능에 관여하는 실재적 에너지가 소멸된 자리에 미련과 집착으로 속절없이 머무르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정보는 단지 정보로써 가치를 지닌다. 객관적 참조와 적절한 활용을 넘어서는 생각 행위는 불필요하도록 과도한 자기 방어 기제에 의해서 염려와 그에 상응하는 부정적인 정서로 나타난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미래에 지배당하는 생각 행위 또한 마찬가지이다.
나는 일찍이 미래에 대한 패러다임을 수정해야 함을 배운 바 있다.
우리가 인지하는 미래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허상의 개념일 뿐, 현재가 곧 미래라고 한다.
전혀 확정되지 않은 미지의 영역임에도 현재의 나를 그 미래에 대입하여 유불리를 비교하는 오류를 저지르는 것이다.
내가 현재를 오롯이 살아낸 만큼 그 값이 어떤 왜곡이나 변질 없이 그대로 미래 좌표로 치환된다는 단순한 공식 아래, 현재에 몰입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충만감이 곧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며, 지금 밥을 먹지 않은 자가 잠시 후 에너지의 대사 작용을 기대할 수는 없듯, 현재를 살지 않는 자에게 미래란 염려라는 허상 속 그림 외 어떤 식으로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염려는 '불안 최대의 먹잇감'이라고 한다. 여기서 발생하는 불안은 정신학적 측면에서 비정상적인 질환상태로 간주하는 성질의 것으로, 태초에 전혀 불안할 필요가 없었던 대상에 대해서 비생산적이고 소모적인 염려를 기폭제로 하여 발생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때문에 정상적 불안이 되려 염려의 소재가 되는 그 반대의 경로도 주지한다.
인간은 태초에 자기 발전과 추구를 위해서 반드시 온당한 두려움과 불안을 느낄 줄 알아야 하는 생물이기 때문이다.
지극히 불완전한 존재에게 운명적으로 선제되는 혼란은 우리에게 불안과 두려움의 상념을 준다.
거대한 신의 섭리 앞에서, 경이로운 대자연 앞에서, 인간의 양면성과 삶의 모순성 앞에서, 미처 전부 이해할 수 없는 무의식 세계의 신비 앞에서 등 압도적인 그 무엇 앞에서 불가피하게 찾아오는 초조한 불안은 우리에게 두 가지 길을 제시한다.
염려의 늪에 빠져 허우적댈 것인가, 이 상념을 영감으로 삼아 순수한 사유의 재료로 삼는 연습을 할 것인가.
염려를 정제하면 생각이 현재에 머무른 매력적인 의문과 호기심, 정신을 고무하는 의심에 의해 구성된 창조적 '가정'만이 남게 된다.
염려란 곧 스스로의 입장과 안위에 있어서 유리한 그 무엇에 대한 집착과 욕심에서 파급된 조급한 '정답 주의'와 안전 지향의 '특권 의식'이 결합된 형태이기 때문에 불안과 혼란이 내게 제시한 모종의 '가정'을 재앙적 사고로 급발진시킨다.
모처럼 자각된 순수한 사유의 소재가 곧 미래를 염려하는 그 무엇으로 변질되어 버리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끊임없이 관찰하고, 의심하고, 묻고, 가정하고, 고뇌하되, 그 자리에 본능적으로 내게 '유리한 것', '필요한 것', '안심되는 것', '쾌적한 것', '익숙한 것'을 애호하는 자기애를 결합시키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어떤 두려움과 불안은 없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되려 존재해야만 하는 당연한 것이라면 그것을 느낄 수 있음을 더없는 행운으로 여기고 싶다.
마치 '어떻게?'라고 물으며 주어진 틀의 한계 외부를 기웃거리는 '불안한 자', '아픈 자'가 결국 더 높은 차원의 절대적 존재를 갈망하고 믿게 되는 것처럼, 아프지 않으면 결코 움직이지 않고 변화하려 하지 않으며 그 자리에 귀속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다만 이 불안을 자기애로 염려하지 않고 순수한 사랑으로 궁구하여 영위해 나갈 때 불안은 더없이 고무적이고 낭만적인 소망을 품은 미래 기대의 에너지가 된다.
높은 지성의 세계에서 대물림되어 온 정신을 단련하는 교육법이란 늘 스스로 생각하는 힘과 표현하는 능력을 신장하기 위함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새로이 제기된 명제와 그 반대 입장이 상존하고 충돌할 때, '의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며, 의심은 정신을 북돋우어 더욱 상세한 탐구로 실증적 가능성을 위한 행동으로 나아가게 하고, 이 과정이 반복될수록 입체적인 완성도를 더함에 따라 모종의 '확신'이 생겨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인간은 여기에서 완전한 안심입명의 경지를 찾아내는 것이라, 이미 그 자신의 실증적 소임을 마친 괴테는 말한다.
그리고 나는 지금 물리적 현전에서 실재하는 한 인간의 내면 안에서 이와 같은 전인격적 과정이 온전히 완성되어 가는 하나의 경우를 직접 목격하고 있다.
심지어 단지 감화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를 아낌없이 전수받아 배울 수 있으니 내게 사랑으로 허락된 지고의 순리에 어찌 마음을 다해서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