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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avis and Johnnie Mar 01. 2023

깨어 있기 위한 초점

'관(觀)'과 '견(見)'의 세계

  '초점이 뚜렷한 삶'은 곧 항시 '깨어 있는 삶'이며 동시에 '관(觀)'의 자세가 삶의 기본이 되어 있는 것과도 일맥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관'이라는 행위에 무슨 취미 활동처럼 재미 볼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관‘ 그 자체만이 목적이어서 '관' 하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내가 추구하고 소망하는 어떤 방향성 위에서 쉽사리 변치 않는 삶의 확고한 견지가 요요하게 빛날 때, '관'의 자세는 반드시 필요한 방향키의 미덕으로 간주되어 더욱 효용성 있게 역력해지고 실제적 체득으로 이어질 것이다.

달리 말해 초점이 뚜렷하지 않으면 '관'의 노력도 잘 되지 않을 것이요, 심지어는 '관'의 개념에 대한 깨달음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 채, 모든 삶의 자극들로부터 통증이 느껴질 때마다 지는 게임은 절대 하지 않는다는 집착적 일념으로 승리의 수를 계산하는 회로를 가열시키는 데 생을 낭비하게 되리라.


  염려가 찰나의 깜빡임 같은 속임수의 범주를 좀처럼 넘어서지 못하도록 조절하고 주도하고자 열심인 나지만, 그래도 한 번씩 유독 긴 염려의 터널을 지나다 보면 중간쯤에서 나를 기다리던 자조가 몸을 일으키며 엉큼하게 인사한다.

삶의 요소 안에서 끝없이 병렬된 자기애의 구조가 모순적으로 순환하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덫의 모습이 되어 드러날 때, 그 띠를 만든 이력의 속성들을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하나씩 반추할 때마다 초점이 뚜렷하지 못한 자의 자신감은 한 단계씩 하락하고 주눅의 범위는 확장된다.

정답의 매뉴얼이 제시되어 있다면 정답만을 쫓으면 되니까 편할 텐데, 충만과 자족의 세계에는 오직 순수한 자유가 열려 있을 뿐 도통 정답이 없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답은 나와 하나님의 소통 안에 극진토록 내밀한 영감과 직관의 형태로 존재하며 나와 무관한 외부를 통해서 정립할 수 있는 것이 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이곳은 성공과 실패의 개념도 요원하기에 혼란조차 누려지는 곳, 정묘한 사랑에 구속된 용병이 되어, 늘 아쉬운 것은 그대가 아니라 소인이지요, 질척대는 비굴함이라도 감동의 기쁨으로 환원되는 곳이다.

그런데 내면에 믿음과 확신이 부족한 자는 스스로의 즉시적 생각과 말과 행동의 불순성을 일일이 의심의 눈길로 바라보게 되고, 염려에 대항하는 회로를 돌리다 못해 소진되어 급기야 자유의 권리를 차라리 박탈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에 이른다.


  나의 경우, 소위 '느낌대로' 산다고들 흔히 말하듯, 매 순간 지극히 즉흥적이고 제한 없이 방종한 감각을 통한 자유로운 본능적 실행의 가치가 내적 충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개성을 지니고 있고, 이는 하나님이 그렇게 지어주신 설계의 숨은 뜻에 따라 어떤 좋은 것과도 결코 등가교환할 수 있는 것이 될 수 없다.

모든 착상과 발상에 있어서도, 그것을 글을 포함한 여러 표현의 수단으로 드러낼 때도, 타인과 소통을 나눌 때도, 그 개성을 거스른 채 억지로 제도적 체계화 및 조직화를 애써봤자 내 뇌 구조에서는 어차피 잘하지도 못하거니와 그로부터 재미를 느끼지 못하니 반드시 억압이 된다.

한편 기질적 자유를 누리고자 할수록 절대적 가치의 확립과 순종을 경시하고 실존적 유희에 도취되어 나 이외 주변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함몰 상태에 놓이기 십상이다.

이렇듯 자신의 가없는 기쁨인 동시에 더없이 못 미더운 기질에 대한 염려를 보상하고자 강박적 정답주의와 계획주의에 미혹되어 버렸을 때 나는 소질도 없는 확률게임을 하려고 든다.

타고난 기질을 죽이는 논리로부터 얻어지는 보상 따위에 성공한 적은 이제껏 단 한 번도 없으면서 말이다.


  범사로부터 연결되는 모든 사건성 안에서 떳떳한 방종함으로 거리낌 없는 출력의 재미를 누리고 싶다면 불변의 초점으로부터 영혼의 중심이 관통하여 어떤 경우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거대한 구속이 필요하다.

이 구속은 세상적 차원에서 일컫는 폐쇄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 뜻의 거대함 속 먼지만큼의 일부를 구성하기 위해 얽혀드는 영광스러운 연동 현상을 의미한다.

내가 무엇을 하더라도, 먹거나, 마시거나,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그 어느 때라도 나는 개성의 본능이 내키는 대로 마음껏 자유를 누릴 수 있겠지만, 그 모든 것은 동시에 변치 않는 의(義)를 알고자 함이니.

그것이 내게 허락된 모든 자원을 오직 하나의 뚜렷한 초점을 거쳐 내 식의 이야기로 탈바꿈하는 마술이자 그 신비를 실증하는 방식이다.

누군가의 재미있는 표현대로 내 최고의 고객은 어느 누구도 아닌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둘 이상의 사람이 믿음을 위해 서로 결합되었을 때 발생하는 시너지 효과를 노린다고 하신다.

 즉 동행하는 '당신'과 '나' 사이에는 반드시 예수님께서 존재하고 계시며 그 사랑이 흐르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그래요, 바로 거기 당신이요).

나는 물리적 생의 어느 단계에서나 분명 변화의 여지가 끊임없이 남아 있을 터이고, 아마 마지막까지도 볼썽사나운 오류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미흡함 속에서도 그 어떤 부차적인 목적에 현혹되지 않고 순수한 초점으로 보고 느끼며, 즉시, 곧장, 충실하게 표현할 것이니, 그럴 수 있도록 엮어주신 관계성의 은혜 안에서 어떻게든 예수님의 사랑을 조금씩 배울 수 있다면 그 외 다른 정답은 무엇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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