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편지는 늘 답장이었다. 그런 내가 의지대로 편지를 써본 건 작년이 처음이었다.
8살이 되던 해 명절에 만난 사촌 언니는 내게 편지를 하라며 주소를 적어줬다. 나는 굳이 편지를 써야 하나, 전화도 있고, 거리가 멀린 하지만 명절이나 방학 때마다 만나는데 귀찮게 편지를 주고받아야 하나 생각했다. 그래서 사촌 언니가 10통의 편지를 보낼 때 1통을 겨우 보내곤 했다.
학창 시절에 친하게 지낸 친구들도 유독 편지를 좋아했다. 그때도 편지에 대한 내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지금까지 일기도 꾸준히 써본 적 없었고, 몇 년 전까진 독후감도 써 본 적 없던 내게 친구가 읽는 글을 쓰라는 건, 꽤나 귀찮고 비효율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작년에 문득 편지가 쓰고 싶어서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의지대로 쓴 편지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친구를 만나면 수다쟁이가 된다. 이런 말 저런 말, 심지어 스치는 생각까지도 말하는 편이고 친구에게 꼭 전하고픈 말도 양껏 다 전하곤 했다. 그런데 그날은 너무 전하고픈 진심을 말로만 전하는 게 아쉬운 맘이 드는 날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보관할 수 있는 무엇으로 나의 말을 남기고 싶었다. 그래서 편지를 썼다. 그리고 알았다. 편지를 쓰고 싶은 마음과 편지로 보내고 싶은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내게 보내온 편지도 나와 비슷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사촌 언니는 늘 무언가 간직하는 걸 좋아했다. 우표를 모으기도 하고, 엽서나 책갈피를 모으기도 했다. 언젠가 우연히 할머니의 잡동사니 상자를 발견했을 때, 할머니는 사촌들에게 갖고 싶은 게 있으면 가지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나는 신기하게 생긴 자석을 가졌고, 사촌 동생들은 팔찌, 피규어 등 각자가 좋아하는 것을 챙겼다. 그때 사촌 언니는 그중 가장 작은 무언가를 챙겼다. 그게 무엇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이유는 또렷하게 기억난다. 상자 안에 있는 물건 중 가장 오래 보관할 수 있는 걸 챙겼다고 했다. 내게 꾸준히 편지를 써주는 어떤 친구도 꼭 함께 만나는 날이면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을 인화해서 방에 붙여두곤 했다.
어쩌면 나는 그들의 행동을 통해, 눈에 보이는 물체로 남기고 싶은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눈치챈 마음을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을 만큼 깨닫게 된 건 작년이 처음이었다.
‘편지할게요.’라는 문장은 생소할 거 없는 문장이지만, 그 문장의 의미가 진심으로 마음에 닿아서 쓰인 적은 처음이다. 진심이 쌓인 단어가 생기는 순간마다, 내 머릿속 사전에서 그 단어가 짙어지는 느낌이다. 지금도 내겐 누군가의 마음이 조금씩 쌓이고 있을 것이다. 그 마음을 깨닫게 되는 날, 또 글을 통해 그 마음을 정리할 것 같다. 짙어지는 단어가 많아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