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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뫼 Oct 15. 2019

단지 음악일 뿐이다

02. 현을 위한 애가 [찬란한 슬픔]

 예술을 감상하는 특별한 '방법'이란 것은 없다. 필자는 예술이 어떤 한 사람에게, 어느 때에 어떤 의미로 필요가 되는지에 따라 선택된 '모습'만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모습들 중 한 가지 모습으로의 음악 감상을 굳이 권해본다. '온전히, 즉 사유 없이 음악이 각 개인에게 주는 감정에 집중한 채로.'



구스타프 말러, 교향곡 제5번 올림 다단조 중 4악장. 아다지에토

Gustav Mahler, Symphony No. 5 in C sharp minor : IV. Adagietto

NHK Symphony Orchestra, 정명훈 지휘



 "위 음악은 당신에게 어떤 감정을 주는가?"

 감각적 능력만을 요하는 단순한 음악 감상은 두 가지의 큰 범주 안에서 설명이 가능한 감정을 가져다준다. '슬픔', 또는 '밝음'(슬픔의 반대에 선 마땅한 어휘를 찾을 수가 없다. 적어도 '기쁨'은 어울리지 않으니). 이 음악을 처음 들었던 고등학생 시절의 필자는 상당한 '슬픔'을 느꼈다.




 위 곡, 말러의 교향곡 제5번 4악장에는 작곡 배경에 대한 잘 알려진 일화가 있다. 지휘자 빌렘 멩겔베르크(Willem Mengelberg)에 의하면, 말러는 그의 평생의 반려자인 알마 말러(Alma Mahler)와의 첫 만남을 위해 이 악보를 그녀에게 보냈고, 악보를 받은 알마는 자신에게 오라는 답장을 보냄으로써 그들의 관계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물론, 사랑이 기쁘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좋아하는 사람에게 만남을 원하며 처음 그 마음을 전하는 순간이 슬플 리는 만무하다. 그렇다면 필자가 느낀 슬픔은 틀린 것인가. 그게 아니면, 멩겔베르크의 증언이 사실이라고 가정하고 작곡자 본인의 의도를 듣는 이에게 완벽하게 관철시키지 못한 이 음악이 실패한 것인가.

 이미 슬픔이라는 '감정'을 느끼기, 보다 훨씬 앞서 이 음악의 고결한 아름다움이 허다한 것을 덮고 있었기에, 실패는 감히 말할 수 없는 것. 그래서 필자는 스스로에게서 답을 찾기로 한다.


"음악에게서 느낀 당신의 감정의 출처는 무엇인가?"

 필자가 먼저 헤집었던 것은 음악의 요소였다. 학창 시절, 음악 시간에 조성(調性, tonality)에 대해 배우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음악의 느낌이 밝으면 장조(Major)이고 어두우면 단조(Minor)라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이 관념은, 작곡 배경대로라면 밝음을 느껴야 할 음악에서 슬픔을 느낌이 필시 단조성이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했고, 이는 음악 속에서 슬픔을 제공하는 분명한 원인이 있다는 안도와, 그것에서 비롯된 필자의 감정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님과, 말러가 자신의 의도를 극대화하기 위해 모순과 반어적인 작곡 전개 방식(마치 영화 <양들의 침묵>에서 한니발 렉터의 살인 장면에 사용된 바흐의 '골든베르크 변주곡'처럼)을 택했다는 감탄 등의 다소 과한 합리화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악보를 읽어갔던 찰나, 악보의 처음 비올라로부터 시작하는 계이름 도(C)가 다다른 세 번째 마디의 콘트라베이스의 가장 낮은음을 확인하는 그 순간, 감정의 출처에 대한 조사는 고사하고 지금까지 믿어온 음악적 관념들이 도리어 찢기기 시작했다. 음악이 어둡다고 다 단조는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이 작품은 F '장조'였다.


 그 일이 있고 가까운 어느 날, 음악을 하나 들었다. Hey의 <Je t'aime>라는 대중음악이다. 작곡 배경으로 미루어 짐작할 뿐이었던 말러 교향곡 제5번 4악장의 작곡자 마음을 말로 표현한듯한 가사에, 누가 들어도 밝은 풍의,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설렘을 상상케 하는 음악이다. 그러나, 이 노래에게서도 필자는 오직 슬픔만을 느꼈다.


 언어와 더불어 음악조차 명확하게 일관된 '밝음'을 담고 있는 이 노래에게서 정반대의 감정을 느낀 필자는, 그제야 감정의 근원이 음악이 아닐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음악을 들었을 때의 필자의 감정 상태, 첫사랑의 아픔으로 슬픔에 허우적대던 당시 필자의 감정이 바로 그 이유였다. 그러나 음악과 감정의 상관관계에 대한 이 새로운 깨우침에도 불구하고, 답이 여러 개일 수 있다는 생각을 미처 할 수 없었던 고작 18살의 어린 필자에겐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한 채, 음악이 말하는 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자책만이 있을 뿐이었다. 




구스타프 말러, 교향곡 제5번 4악장. 아다지에토

 오늘날 이 악장은 유명 인사들의 장례식장에서 빈번히 연주되기도 한다. 혹자는 "사랑을 노래하는 음악을 어떻게 죽음이 깃든 곳에 두느냐?"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필자는 혹자의 말 자체에 의문을 두고 "'사랑을 구하는 것'과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것'이 무엇이 다르냐?"라고 질문하겠으나, 말러는 이미 자신의 교향곡 제5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열정적이고 거칠고 비극적이고 엄숙하며 인간이 가진 모든 감정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단지 음악일 뿐이다. 여기에는 어떠한 형이상학적 질문의 자취도 남아 있지 않다."라고.




"단지 음악일 뿐이다."

 "작곡자의 세계와 주관으로 시작한 것이 객관적인 객체가 되어 새로운 주관들로 풀어헤쳐진다.". 현재의 필자가 내린 '음악'의 정의이다. 음악에는 작곡자의 모든 생각이 투영되어 있지만, 동시에 그렇지 않은 것이 된다. 듣는 이들에게 다시 무엇으로든 정의될 수 있으며, 필자는 저마다의 정의가 되어 돌아오는 그러한 음악을 사랑한다. 그리고 아무것도 틀리지 않았다. 18살의 필자가 말러의 음악에게서 느꼈던 '슬픔'은 생각하건대, 당시의 필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었을지 모른다. 오히려 필자의 슬픔을 위해 음악이 제 뜻을 바꾸어 슬픔으로 찾아온 것이며, 그것의 목적은 단지 곁에 머무는 것이었을지도.


 글을 쓰기 위해 최근 말러 교향곡 제5번 4악장을 계속해서 들었다. 한 번은 음악이 틀린 채로 사랑하는 사람과 통화를 했다. 음악은 더 이상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황홀했다. 




< 현을 위한 애가 : 찬란한 슬픔 >

 작곡 강한뫼 (2012년 - 2015년)


 2012년 4월, 사랑하는 친구의 비보悲報. 인생에서 처음 맞게 된 친구의 죽음이다. 허망한 그 소식 앞, 바쁜 삶을 핑계로 나는 그 친구를 찾지 않았다. 여전히 후회하고 부끄러운 선택이다. 이 음악에 무엇이 담긴 건지는 모르겠다. 볼품없는 내 모습을 담았을 것이고, 후회, 미안함, 그리움 등......, 아, 그리고 '추억'.

 완성된 악보 아래 한편에 친구 이름 석자를 적고는 '사랑하는...'을 몇 번이고 썼다 지웠다. 아마 친구 된 자격을 생각함일 게다. 그리고는 고민했다, '추억'이 왜 이 음악의 마지막에 담긴 것인가를.


 2015년 6월, 연주 기회가 찾아왔다. 깊은 서랍 속에 보관되었던 그날의 작품이 떠올랐다. 친구의 이름과 함께 꺼내 들어본다. 그때 그 기억과 부끄러움이 여전히 깃들어 있다. 죽은 친구의 부모님을 연주회에 모셨다. 이마저도 무례한 행동은 아닌지, 수도 없이 고민했지만 끝끝내 초대의 말을 건넸더랬다. 공연이 끝나고 어머님을 만났다. 아들을 기억해줘서 고맙다며 봉투 하나를 주셨다. 돈이 들어 있음을 직감했다.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나는 봉투를 받았고, 가지지는 못했다. 신이라면 어머님의 마음을 헤아리겠거니, 교회로 향했다. 그리고 신에게 외쳤다. "나는 여전히 형편없는 사람인가 봅니다."


먼저 하늘에 닿은 나의 사랑하는 친구

故 서정일을 더욱 사랑하며




 필자의 인생 중 가장 큰 슬픔에 대한 기록이다. <현을 위한 애가 : 찬란한 슬픔>은 스스로를 찌르며 동시에 용서를 구하는 기도이자, 필자의 부끄러운 속을 내보임과 같다. 그러나 설령 이 음악이 당신에게 행복감을 선사한다 한들 잘못되지 않았고, 사랑을 고백하는 일에 이용한다 한들 틀리지 않았음을 전한다. 앞서 장황하게 이야기한 바, 단지 음악이 됨이다. 필자의 음악은, 통해 주어지는 당신의 삶의 위로 보다 결코 크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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