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우면 재택을 합니다.
멜입니다.
주말 내내 구리구리하던 하늘 덕에 오래간만에 온도가 급격하게 낮아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침 노트북을 싸매고 온 지난 목요일의 나를 칭찬합니다. 오늘은 따뜻하게 재택을 할 수 있으니까요.
한국에 들어온 지 이제 5개월. 벌써 1년의 반을 채워가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큰 사고를 치지 않았습니다. 아니, 큰 사고를 칠 것이라는 전제 자체가 잘못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인생의 고작 6분의 1 정도만 한국을 떠나 있었는걸요. 하지만 이렇게 금방 한국에 물들어 버릴 줄은 몰랐습니다. 너무나 한국인인 제 자신이 야속할 정도입니다.
벼르던 치악산 등반 후 노곤노곤하여 밤 10시부터 잠을 청했습니다. 덕분에 새벽 3시에 눈을 반짝하고 떴지요. 뒤척이다가 다시 잠들어서 그런지 꿈속에 대서사시가 그려졌습니다. 꿈에서 거의 깰 무렵, 이상하게 영화 OST처럼 거미의 '친구라도 될 걸 그랬어' 노래가 귓속에 울려 퍼졌습니다. 깨면서 피식했어요. 요란한 것도 모자라 OST까지 붙여가면서 꿈을 꾸는구나.
눈은 떠졌지만 몸을 일으키지 않고 노래를 검색하여 반복 듣기를 합니다. 노래가사를 보아하니 남주가 있는 서사극이었던 듯한데 도대체 누구한테 미련이 남아서 친구라도 될 걸 그랬는지 생각이 났을까요. 노랫소리를 듣고 어느새 엄마가 들어와 생사여부를 확인합니다. 아, 한국을 뜨기 전과 다른 점은 새벽에 부모님이 수시로 들어와서 침대에 애가 잘 누워있나, 이불을 잘 덮고 있나를 확인한다는 겁니다. 잠귀가 밝은 저는 발소리로 엄마인지 아빠인지 가려냅니다. 부모님이 귀여우면서도 죄송스럽고 그렇습니다.
대충 머리띠와 안경으로 재택 아이템을 갖추고 일을 하다가 답하지 않았던 메신저들에, 메일에 답을 합니다. 그때 문득 생각나는 전 사수. 거의 스파이급으로 회사 상황들을 전해주는 전 동료에 따르면 저의 전 사수는 이번에 또 승진을 하여 한국/일본 헤드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녀가 자랑스럽고 멋지고 그 왕관의 무게만큼 주어질 스트레스를 잘 헤쳐나가며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승진 축하문자에 전 사수는 반갑게 답장을 해줍니다. 며칠 전 꿈에 네가 나왔다나. 현 회사에서 너무나 잘 적응하고 있다고 자랑했다고 합니다. 꿈은 반대라더니 조금 씁쓸합니다. 저와 둘이서 팀을 꾸려갈 때가 문득 생각나고 그립다고 합니다. 둘이 앉아 큰 꿈을 꾸던 그 시절, 옆 콘도에서 부지런히 오가며 저녁을 얻어먹던 그 시절, 코로나 때문에 가까이에 있어도 화면으로 일을 했던 그 시절. 코로나는 끝나지 않았지만 저와 전 회사, 전 사수, 그리고 싱가포르는 끝이 났네요.
생각이 많아지기 전에 할 일들을 주섬주섬 챙깁니다. 11시에 자면 6시까지 푹 잠을 잘 수 있을까요, 오늘 꿈에는 전 사수와 나란히 싱가포르를 거닐까요.
치얼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