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알토민 May 12. 2023

역사의 피인가, 피의 유산인가.

<영화 길복순>과 <창덕궁> 바라보기

 



 역사의 피인가, 피의 유산인가.


 넷플릭스의 최신 킬러콘텐츠 영화 "길복순"을 보고 있었다.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찰나 이목을 사로잡는 장면이 흘러나왔다. 극 중 주인공인 킬러와 그의 딸은 식탁에서 세상의 모녀관계가 그러하듯 작은 일상을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자연스레 "위인"으로 옮겨갔다. 10만원권 지폐에 들어갈 위인으로 누가 적절한가!라는 흥미로운 주제였다.


 딸은 다름 아닌 학교 역사토론시간의 주제였다는 말과 함께 광개토대왕, 을지문덕 , 안중근, 김구를 거론했다. 그리고는 네 인물이 공통점이 있다는 이야기를 무심한 사람의 얼굴로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을 "모두 사람을 죽인 사람들이다." 라며 규정했다. 이 말을 듣자 엄마는 속내를 들킨 킬러마냥 당황했다. 이윽고 시청자인 나도 단단한 얼음처럼 그 지점에 멈춰 섰다. 일상을 나누는 모녀간의 모습이라기엔 딸의 대답은 너무나 심오했다.


 길복순의 성씨 "길"이 kill에서 온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영화는 킬러를 주인공으로 한다. 그러므로 저 대사 속에는 연출자의 영화적 의미나 의도가 있었겠거니라며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의도를 짐작하는 것과 내용을 이해하고 수긍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네 위인에 대한 딸의 평가가 "역사적 맥락"이 제거된 발언 같아 조금 불편함을 느꼈다. 침략당한 약자로서 조국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불살랐던 위인들의 행동이 "숭고한 희생"으로썬 고려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럼에도 딸의 말은 한참 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다. 달리 생각해 보니 새로이 보이는 지점이 있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훌륭한 사람이 되라며 교육받아 왔고, 동시에 또 가르치지만 거기엔 그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죽이라는 내용은 없다. 그런데 우리가 위인으로 추앙하는 대다수 사람들은 스스로를 희생하면서 죽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아니면 살기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만 했다. 위인들에 대한 평가와 별개로 이런 비극이 또 있을까. 스스로를, 조국을 지키려는 몸짓은 살육이 아니고선 불가능했다. 희생과 숭고함은 피바람이 아니고선 가능하지 않았다. 그게 우리가 최근까지 이어 온 역사다.


 '피바람'하면 곧장 연상되는 역사적 인물이 있다. 조선왕조 3대 임금인 태종 이방원이다. 몇 해 전부터 궁궐 해설을 시작하면서, 내 해설의 도입부는 늘 그의 차지였다. 해설 공간인 창덕궁은 바로 태종 임금이 지은 곳이다.
 태종 임금이 궁궐을 기피했기에 존재할 수 있었던 궁궐. 창덕궁은 이처럼 환영받지 못한 궁궐에 의해 잉태했다.  조선왕조하면 대부분 경복궁을 떠올린다. 조선왕조와 함께 태동한 경복궁에 우리는 정궁(법궁)이라 칭한다.  그런데 태종은 조선의 선조들이 정통성을 담아 빚은 경복궁을 꺼려했다. 왕자의 난을 거치며 피와 살육이 점철된 곳이라 그랬던 걸까. 태종이 경복궁을 기피한 사실은 기록 곳곳에서 드러난다. 결국 태종은 법궁 경복궁을 놔두고 창덕궁을 지어라 명한다.

 창덕궁에서 해설 할 때면 내가 자랑 스러이 여기며 강조하는 대목이 있다. "창덕궁!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다." 이러한 사실을 말하다 보면 이야기하는 나 조차도 뿌듯함에 취해 말의 톤과 어조가 높아질 때가 있다. 더군다나 5대 궁궐 중에서는 창덕궁이 유일하다. 그렇다면 왜 조선을 대표하는 궁궐인 경복궁이 아닌 걸까.
 유네스코의 세계유산 선정기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뛰어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를 지니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유네스코는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현재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고 미래세대에 물려주어야 할 자산"인지를 철저히 검증한다.

창덕궁 세계유산기념비



 경복궁은 조선의 법궁으로서 철저히 구상하고 설계한 궁궐이다. 이를테면 계획형 도시다. 그래서 규칙성과 상징성이 뚜렷하고 그로부터 비롯되는 건축적 정형미는 어떠한 위엄과 권위를 느끼게 한다. 그에 반면 창덕궁은 당시 그저 이궁일 뿐이었다. 궁궐 밖에 설치한 보조궁궐로 태종이 도망치다시 회피하며 지은 곳이다. 이후 계속 머물면서 필요에 따라 전각을 하나씩 증설하였다. 그래서 전각의 건립연도가 제각각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그렇기에 창덕궁이 세계유산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계획하여 짓지 않았기 때문에.

 창덕궁에 정문인 돈화문으로 들어선 후 조금만 더 나아가면 "세계유산 등재 기념비"를 만날 수 있다. 기념비에 아로새겨진 글귀에는 창덕궁의 등재이유가 살며시 엿보인다.
[...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한 건축과 조경의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며 특히 왕궁의 정원인 후원은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 정원으로 손꼽힌다.]

 전통건축과 후원을 대표로 하는 자연의 조화로움을 주요한 요소로 꼽고 있다. 창덕궁을 걷다 보면 동선이 지그재그로 바뀌는 지점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이는 경복궁과 대비되는 부분이기도 한데, 창덕궁이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그 사이사이에 건물을 올렸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앞서 언급한 창덕궁이 이궁으로 시작한 것과 연결된다. 태종이 온전한 법궁을 놓아두고 이궁을 새로 지어 그곳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궁에 궁궐의 규모, 건축적 조형미, 성리학적 질서 등을 체계적으로 고려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지어올린 전각은 자연과의 조화, 즉 전통건축과 조경의 조화라는 위대한 유산으로 변모하였다. 이 유산의 아름다움은 오늘날 모든 인류가 공유하고 지키며 후손에 물려주어야 할 가치(세계유산)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만약 태종이 창덕궁을 짓지 않았다면, 아니 그에 앞서 태종이 왕자의 난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오늘날 사람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아름다운 창덕궁을 만나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피바람을 몰고 온 살육이 모든 인류가 지키고 보전하여야 할 세계유산의 "시작"이었다고 한다면 이 또한 아이러니가 아닐까. 우리에게 남겨진 유산의 현재적 의미와 가치는 본래의 의도와는 무관할 수 있음에 대해 생각한다.
 그럼에도 계기와 이유는 그리 중요치 않다. 역사를 논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인생도 '의도'와는 정말 다른 결과들이 때때로 일어나니까.
 의도는 사라지고 없지만 궁궐은 우리 앞에 남았다.  계절과 날씨의 변화에 따라 각양각색의 옷으로 갈아입는 아름다운 창덕궁을 숨 쉬듯 순간순간 느낀다. 시민들의 경쾌한 발걸음 속에서도 자연의 정취를 오롯이 품고 있는 창덕궁의 가치를 매일 발견하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욕심과 명분이 만나는 곳에 백성의 자리는 없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