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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 Mar 21. 2024

마당 있는 집을 떠나기로 했다.

 우리 가족 첫 단독 주택을 떠나며. 

 적어도 6년은 살고 떠났으면 했다. 첫 신혼집 아파트에서 보낸 것과 같은 시간, 6년. 그때 아파트를 떠나면서 '이 정도 살았으면 됐다' 싶어서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래도 가능하다면 더 길게, 첫째 중학교까지 살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무 정보 없이 들어온 동네인데 학교도 참 마음에 들었다. 조용한 골목이 좋았다. 창 마다 다른 풍경이 좋았다. 그런데 그 모든 풍경이 다 녹색이어서 좋았다. 같은 계절을 네 번째 반복하는데 그때마다 새로운 게 보이고 또 익숙한 풍경이 반복되는 게 좋았다. 무튼, 오래 살고 싶었다.


 그런 집을, 우리 가족의 첫 단독주택을, 그렇게 살고 싶었던 마당 있는 집을- 떠났다. 


 3년 10개월. 만개한 벚꽃이 흩날리 때 구경 갔던 집을 한눈에 반해 덜컥 계약해 버리고. 그 이듬해 두 번째 벚꽃을 바라보며 '아, 벚꽃이 지고 난 자리에는 버찌 열매가 맺히는구나' 알게 됐다. 현관 바로 앞에 적당한 크기의 단풍나무가 있는데 두 집 사이에 끼어서 볕을 천천히 받느라 다른 단풍보다 조금 늦게 붉어졌다. 늦가을 찬바람이 불 때쯤 현관문을 열면 문을 연 그 바람에, 늦게 붉어지고 늦게 떨어진 단풍잎들이 팽그르르르, 원을 그리며 돌았다. 나는 그게 참 좋았다. 아, 겨울이 오는구나. 나한테는 단풍잎이 그리는 그 곡선이 겨울의 신호였다. 네 번째 겨울을 맞았을 때, 더 이상 덜덜 떨며 드라이기를 들고 얼어붙은 보일러를 녹이고 서 있지 않아도 됐다. 그냥 '오늘은 따듯한 물을 조금 틀어놓고 자야 되겠다' 알게 됐다. 어느 순간부터 세콤은 꺼놨다. 단독주택에 사는 게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고양이가 센서를 건드려서 한밤 중 '침입 상태입니다'라고 울려댈 게 더 무서웠다.


 짐을 두 번 나눠 이사를 나갔는데 첫 짐이 나갈 때 눈이 펑펑 내렸다. 남편이랑 펑펑 내리는 눈을, 마당에 쌓인 눈을 바라보는데 헛웃음이 나왔다. '아주 그냥, 울어라 울어라 작정을 하는구나' 뭐, 그런 말들을 나눴다. 짐을 옮기던 업체 분들도 잠깐씩 멈춰 서서 '경치가 끝내주네요'라고 말한 뒤 '눈이 오는 날 이사하면 좋은 거래요'라고 위로(!)해주셨다. 땅과 같은 높이에서, 눈이 마당 위로 나무 위로 쌓여가는 이 풍경을 다시는 볼 수 없겠구나. 이게 마지막이구나. 여기는 끝까지 참 아름답구나. 우리가 참 좋은 곳에서 잘 살았구나 싶었다. 좋은 시간이었다. 눈이 쌓이고, 또 쌓였다. 

_여기서 보는 모든 풍경이 좋았다.


 언젠가 브런치 글을 마무리하면서 '다시 집을 고른다면'이라는 글을 쓰고 싶었다. 살아보니 어떤 게 좋았는지, 다시 집을 고른다면 어떤 기준으로 고를 것인지 뭐 그런 내용들을 정리해두고 싶었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공원이 있는 집, 구조가 탁 트인 집, 마당은 외부 시야에서 가려지는 게 좋더라 뭐 그런 내용들. 그런데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보니 내가 이곳이 좋았던 수많은 이유 중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정작 내가 고를 수 없는 거였다. 좋은 이웃, 좋은 사람이었다.  


 - '무섭다'고 생각했던 옆 집 링컨 할아버지는 우리 가족이 이사 온 첫 해 겨울. 내 차가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는 걸 보고 '둘째가 태어났나 보다' 생각하고 아기 내복을 사다 주셨다. 그 아이가 아장아장 걸어 다닐 때도,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할 때도 '잘 커줘서 고맙다' 고 매번 얘기해 주셨다. 이사 나가기 전 할아버지 댁에 들러 인사하려고 했는데. 이삿짐 트럭을 보고는 내외분이 먼저 들러 인사를 건네주셨다. '좋은 이웃이 있어서 참 좋았다'고, '좋은 이웃을 보내야 해서 아깝다'고. 떠다는 그날에야 우리는 서로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가만 생각해 보면 젊은 부부에게 해주고 싶은 말도 많았을 텐데. 늘 고맙다- 좋았다- 이런 말들만 하셨다. 정말 좋은 어른들이셨다. 


- 감나무집을 지나 열댓 걸음 걸으면 첫째와 같은 학년 친구가 사는 집이 나온다. 아이들은 정작 가까이 지내지 못했는데 언니가 참 좋은 분이셨다. '친정 엄마가 맛있는 반찬을 해주셨다'고, '아이스크림 사는 김에 하나 더 샀다'고, '맛있는 빵집에 들렀다'고... 다양한 이야기가 담긴 봉투가 현관에 놓여졌다. 종종 아이가 학교에 있는 모습을 알려주기도 했다. '할머니 손잡고 오더라', '친구들과 까르르 웃고 놀더라'. 회사에서 종종거리며 사는 나를 위한 배려임을 잘 알고 있다. 선하고 좋은 분이셨다. 


- 첫째 아이는 하나 더 뒷골목, 뛰어가면 '다다다다다닥' 정도 되는 곳에 사는 동갑 친구랑 친하게 지냈다.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아침마다 골목에서 만나 함께 학교를 갔다. 귀엽게도 종종 손을 잡고 학교에 갔다. 그 둘의 뒷모습을 보는 게 행복이었다. 그 뒤로 어느 날은 벚꽃 잎이 날렸고 어느 날은 매미가 울어댔고, 어느 날은 비가 쏟아졌고, 어느 날은 눈이 쌓여 있었다. 둘은 화요일 저녁이면 양쪽 집을 오가며 저녁을 먹고 함께 놀았다. '갑자기 이사를 가게 됐어요'라고 했을 때, 아이들은 공을 차고 놀았지만 언니랑 나는 그만, 울어버렸다. 

- 링컨 할아버지댁 대각선 방향에 있는 목조
주택에는 자그마한 배(!)가 놓여 있었다. 비닐로 덮여 있었는데 무려... 카약이었다! 카약을 타는 역시 첫째와 같은 학년 아이가 살고 있었다. 마당에 손수 만든 라이너(!)가 있는 어마어마한 <금손의 집>이었는데 오고 가는 길에 그 가족과도 인연이 닿았다. 우리는 몇 번 함께 저녁을 먹고, 밤늦게까지 마시고, 먹고, 웃고 떠들었다. 서로 워낙 바빠서 마음만큼 자주 만나지는 못 했지만 만나기만 하면 대화가 끊이지를 않았다. 그 가족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장면은, 우리 아빠 장례식장이다. 늦은 밤, 조문이 끝나갈 때쯤 한 가족이 장례식장으로 들어오는데 '어...?!' 하고, 순간, 머리가 멈춰 섰다. 아버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따로 알리지도 않았는데, 가족 넷이 그 늦은 밤 직접 인사를 하러 온 거였다. 휴대전화로 기사 검색을 하다 부고를 봤는데 내 이름과 소속과 남편 직장 등을 보고 '맞는 것 같아' 하면서 그냥 찾아와 봤다고 했다. 그렇게도 좋은 사람들이어서 만나면 대화가 끊이지 않았었나 보다. 그래서 함께 있으면 설레고 즐거웠다. 마당 있는 집을 가장 잘 누리는 가족이기도 했다. 덕분에 우리도 함께 누리는 시간들이었다. 




 우리 가족 첫 마당 있는 집. 무엇보다 둘째가 태어나 자란 집. 눈이 닿는 곳마다 모두 좋은 기억들로만 가득 들어찼다. 집과도 결국 인연이어야 하는데, 참 좋은 인연이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이제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가기로 했다. 지구 반대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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