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쪽에서 아들이 걸어왔다. 찬란한 빛과 함께.
거짓말 많이 보태서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 나오는 유시진 대위만큼 멋지다.
제법 다부진 몸, 단단한 눈빛 그리고 군복에서 뿜어져 나오는 든든함까지... 몹시 내 스타일이다. 난 팔불출 엄마가 확실하다. 저 믿음직스러운 군인이 내 아들이라고 3호선 고속터미널 역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작년 10월에 입대한 아들은 코로나와 부대 상황 등으로 7개월 만에 첫 휴가를 나왔다. 논산훈련소로 들어갈 때의 축 처진 어깨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당당한 군인이다. 괜스레 울컥해서 아들을 꼬옥 안았다.
"엄마 보고 싶었쪙. 흐흐흐."
입을 여는 순간 군인에서 내 새끼가 됐다.
7개월 만에 만난 아들은 살가웠다. 치킨과 맥주를 마시면서 무척 궁금했던 군생활에 대해 물었다.
아들은 담담하게 논산 훈련소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입소 첫날의 긴장감, 동기들, 세상 친절한 중사님 그리고 처음 훈련받던 날 에피소드 등을 끊임없이 쏟아냈다. 결코 말이 많은 아들이 아니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훈련소에서 있었던 일을 다 말해주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맞장구를 쳐주던 남편이 슬며시 일어났다. 야구를 봐야 한다면서. 아직 중계 시간이 안됐는데...
나 역시 엉덩이를 반쯤 일으켰다. 아들은 일어나는 나에게 냉장고에 있는 맥주 한 캔씩 더 하자고 했다. 오랜만에 만난 아들의 말을 더 들어야겠다. 이야기는 2주간 보급병 교육을 받았던 대전 육군 종합군수학교로 넘어갔다. 나에게는 생소한 병참 교육대 특기병 중대에서 수업받은 이야기 역시 길어졌다. 본격적인 부대 경험담은 다음날부터 이어졌다.
일병과 이병도 구분 못하는 엄마를 앉혀놓고 군대 용어를 설명하는 아들. 낯설었던 군대에서의 생활이 익숙해지고 있다면서 "요즘 군대는 말이야.."라고 썰을 푸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어린 시절의 아들을 보는 것 같았다. 상상 속 친구도 있었고, 이야기도 잘 지어내던 아이였다. 뚱딴지같은 스토리를 듣는 재미가 쏠쏠했었다. 다만 내가 힘들 때는 대꾸해주는 게 귀찮고 지겨웠었다. 말하고 있는 아이에게 입 좀 다물라고 짜증도 냈었다. '만약에 그때로 돌아간다면'이라는 말처럼 힘없고 시시한 것은 없지만, 만약에 내가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그렇게 짜증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더러 했었다.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아들은 입을 다물었다. 말 걸지 말라는 눈빛 레이저를 실시간 쏘았다. 엄마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던 아이가 그리웠고, 그 시간들이 얼마나 행복한 거였는지 알게 됐다. 아무튼 아들은 사춘기라는 인생 발효시간을 치열하게 보냈고, 20대가 되면서 살짝살짝 입을 열기 시작했다.
복귀할 때까지 부대 이야기는 계속됐다. 창고병인 아들은 이제 군수 행정병이라고 한다. 거기에다가 당직병, 상담병, 부대관리병 등을 겸하고 있다고 한다. 맡은 일이 많지만 나름 잘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며칠 동안 들은 아들의 7개월 군인 인생 스토리였다. MSG까지 살짝 또는 듬뿍 쳐가면서 맛깔나게 이야기해주는 아들. 어릴 때 모습이 오버랩됐다. 감사하다.
아들은 7일간의 달콤한 휴가를 끝내고 부대로 복귀했다.
나는... 귀에서 피난다.
그래도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