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덕 Mar 23. 2022

"열려라 참깨!"를 외쳤습니다.


그런 날이 있다.

아침 기상부터 텐션이 마구마구 올라가는 날. 그러다가 정오쯤 되면 스스로도 감당 못할 미친 텐션을 보이는 그런 날 말이다. 새들이 지저기는 소리를 들으면 "그래그래. 어어. 너희도 좋은 하루." 리액션을 입 밖으로 과감히 내뱉는 그런 날. "맛있는 밥이 완성되었습니다. 밥을 저어주세요"라고 말하는 전기밥솥과 세상 다정하게 대화하는 그런 날. 나도 내가 살짝 무서워지는 그런 날이 있다.


그날이 딱 그랬다.

오후에 아들과 같이 슈퍼에서 장을 봤다. 든든한 짐꾼 아들을 앞세우고 아파트 지하 주차장 엘리베이터 앞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3층쯤 내려오고 있었고, 나는 자세를 잡았다. 두 손을 가슴 근처에 모았다. 지하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을 향해 두 팔을 양 옆으로 활짝 벌리면서 소리쳤다. 정확한 '도레미파솔라'의 '라'톤으로.


"열려라 참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한 청년이 쑥 나왔다. 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고개를 푹 숙이고 내 옆을 지나갔지만, 또렷이 듣고 보았다. "!" 소리와 웃는 그의 눈을.

제법 민망했던 나는 얼른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그날 나의  로켓 텐션은 기어이 나를 우리 동네 주책 아줌마로 만들었다.


오랜만에 아들과 같이 있어서였을까?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나는 노크 대신 "열여라 참깨."라고 하면서 아들 방에 들어가곤 했었다.

"어머님. 저는 익숙하지만 아까 그분은 좀 당황하신 것 같았어요. 울 어머님 몇 짤? 하하하."

"나잇값 하라고? 근데 내가 왜 그랬을까? 희한한 일일세. 크크큭"

아들과 나는 서로 마주 보며  한바탕 웃었다.

 

 '나잇값'라고 한다.

사회 통념상 그 나이대에 맞는 말이나 행동, 옷차림 등을 이야기할 때 쓰이는 말이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더 점잖게 행동해야 한다는 의미가 포함된 말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니 20대, 30대 때 그런 이야기를 했었었다. 나는 50대가 되면 청바지를 입지 않을 거라. 나풀나풀 우아한 옷을 세련되게 입을 줄 아는 중년이 될 거라고. 큰 소리로 이야기하지 않고, 살짝살짝 미소 짓는 품위 있는 중년이 될 거라고. 개 풀 뜯어먹는 소리였다. 투박한 청바지는 여전히 데일리룩이고, 우아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웃음소리를 가진 중년 아줌마가 됐다.


아무튼 50대가 되었다고 갑자기 점잖아지지 않았다. 보편적으로 알려진 나잇값은 못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나잇값을 하면서 늙어가고 싶다. 내가 경험했던 것만 옳다고 주장하지 않는 것, 다른 사람의 생각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것,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을 때 호들갑 떨지 않고 대처할 수 있는 지혜를 갖는 것, 입은 되도록 닫고 귀와 지갑을 여는 것. 내가 하고 싶은 나잇값이다.


80대에 이제 막 진입하신 친정 엄마가 그러신다.

"아이고, 50대면 한창 좋을 나이지이. 남들 눈치를 왜 봐.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그냥 하는거지. 그래도 돼.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맛난 것도 많이 먹고, 하루라도 젊을 때 실컷 웃으면서 재미있게 살아." 새겨들으라는 말씀도 덧붙이신다. 나는 부모님 말씀을 잘 듣는 K장녀다. "이 나이에 뭘." 그러면서 소심해지지 않을 것이고, 남들 시선 때문에 억지로 점잖아지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엘리베터에서 마주쳤던 그 청년은 내가 외친 "열려라 참깨!"로 어이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풋."웃어줘서 고맙다. 창피한 에피소드지만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추억이 생겼다.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