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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뭇펭귄 Jul 04. 2021

자유, 당연한가 당연하지 않은가.

올더스 헉슬리 - '멋진 신세계'




 



   모든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구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우리의 모든 생각, 의식 체계, 가치 체계, 취향 등등은 우리를 둘러싼 구조로부터 학습된 것들에 불과하다. 물론 날카로운 철학자라면 구조의 모순에 대해 인식하고 그것으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킬 수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발견한 구조에 대한 모순점들과 그것을 타파하기 위한 해결책이 진실로 옳은 것일까? 사실 우리가 사회에 내리는 진단 이라는 것은 일종의 신념에서 비롯된 열정의 발현에 불과하다. 또한 신념이라는 것은 강력한 심리적 관성이 있어 한 번 고착화되면 쉽사리 바뀌지 않으며, 우리는 그렇게 고착화된 신념에 의거해 각자 나름의 방식대로의 세계관을 가진 채로 살아간다. 내가 아는 만큼 보인다기보다, 믿는 대로 보이는 것이다.

 


   멋진 신세계 에는 두 가지의 신념 체계가 등장한다. '무스타파 몬드' 라는 사상가의 신념 체계와 '존(야만인)' 이라는 사상가의 신념 체계이다. 무스타파 몬드는 인간의 행복이란 '본성대로 살아가는 것' 이라고 믿는다. 그는 인간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으며, 무의식 속에 내재된 여러 욕망과 충동들을 억누르지 않고 마음껏 분출하며 살 때 만족감을 느낀다고 본다. 따라서 그가 설계한 세계에서는 발전도, 퇴보도, 경쟁도 없으며 순결함, 충성심, 책임감 등의 가치체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관점에서 과학적, 산업적 발전이란 끊임없는 경쟁과 자기착취를 수반하므로 부정적이고, 일부일처제의 전통적 가족제도란 성욕의 자유로운 분출을 억제하므로 부정적이며, 선과 악에 대한 이분법적 발상 혹은 특정 가치에 헌신하는 목적론적 삶은 인간을 쓸 데 없이 고독하고, 사색적이게 만들기에 부정적이다. 이와 반대로 몬드가 보는 행복한 인간의 삶이란 본질에 관한 문제에 대해 사유하지 않고, 사사로운 인간관계에 대한 책임감을 갖지 않으며, 다만 오직 본능에만 충실한 '어린아이' 의 상태에 머무르는 삶이다. 



   또한 몬드가 바라는 이상적인 사회란 사회 구성원 각자가 각자의 자리에서 완전한 만족감을 느끼는 사회를 의미한다. 몬드의 멋진 신세계 에서는 모든 인간의 운명이 태어나기 이전에 결정되어 있다. 어떤 이들은 알파 플러스로 태어나 사회 요직에서 지식의 탐구 혹은 시스템을 관리하는 책임을 부여받는다. 어떤 이들은 감마나 델타로 테어나 간단하고 반복적인 업무만을 수행해야 하며, 어떤 이들은 엡실론으로 태어나 독자인 우리의 관점에서 봤을 때 매우 더럽고, 지루한 일들만을 평생 수행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들은 생리학적 통제와 최면 교육을 통해 신체적, 정신적으로 철저히 규격화된 인간으로 만들어짐으로써, 자신의 운명과 다른 계층의 운명을 비교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이 하는 일에 일체의 불만을 갖지 않는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독자인 우리가 그들의 삶에 대해 동정심을 느끼던, 다른 어떠한 감정을 느끼건 간에 그들 자신은 진실되게 행복하며 자신들의 삶에 대해 진실되게 만족한다는 점이다. 이는 인간이 자유를 박탈당함으로써 오히려 행복감과 안정감을 얻게 될 수도 있다는 역설적 상황을 보여준다. 헉슬리는 자본주의, 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자유롭게 사고하며 인생을 스스로 설계해 나갈 자유를 얻은 대신 끊임없는 무력감과 책임감, 경쟁의식에 짓눌린 채 살아가야만 하는 독자들보다 멋진 신세계 속 런던시민들의 얼빠진 어린아이와 같은 삶이 더 행복하다는 역설적 상황을 상정하며, 독자들에게 '주관적 안녕감'과 '자유의 추구' 중 무엇이 더 중요하냐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중반부 부터 등장하는 야만인 '존' 은 '자유' 를 추구하는 한 편 의무론적, 목적론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신' 으로 대표되는 이상향, 즉 순수한 사랑과 완전한 선에 대한 동경 및 그에 다가가기 위한 '자기부인'의 필요성을 체감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소설 속에서는 런던 시민들의 입장에서 대상화되며 '야만인' 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우지만, 사실 책이 쓰여진 1900년대 초중반 서구 유럽인들의 보편적 사고방식을 대표하고 있다. 이는 그의 사상적 기초가 셰익스피어, 성경 등의 '지극시 서구적인 사상의 기원 혹은 그것의 대표작'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그는 인간이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러한 자유로부터 파생되는 혼란과 고통을 감내하는 삶이 아름답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또한 그는 멋진 신세계의 공산품들의 소비를 거부하며 런던 외곽에서 수렵, 채집 생활로 삶을 연명하면서, 레니나를 향한 정욕이 끓어 오를 때마다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가하기도 한다. 그는 자신이 갖고 있는 지극히 서구적인 신념체계를 삶을 통해 증명하려 한 인물이다.



   이렇듯 소설은 '안락하고 만족스러운 백치의 삶' 과 '불안하고 고된 자유인의 삶' 을 대비시키는데, 독자들은 후자인 야만인의 입장에 공감하는 한 편 그의 생각이 소설 속에서 '철저히 소수인, 철저히 비문명화된, 비현실적이고 감상주의적인, 이해받을 수 없는 사고방식' 으로 치부되는 것을 목도함으로써 불편감을 느끼게 된다.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일반적 사고방식이 언젠가는 비일반적인, 비현실적인 사고방식으로 치부되고 규탄받을 수도 있겠다는 일종의 '예견된 무력감' 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은 자유롭게 사고해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정부는 개인의 삶의 방식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사상에 동의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 그러한 '구조'에 암묵적으로 동의받도록 강요받고 있는 백치들은 아닌가? 멋진 신세계의 시민들을 백치라고 동정하고 비난하는 우리 또한 백치는 아닌가 라고 되묻는 것이다. 또한 자유는 자유 그 자체로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맞는가? 몬드의 말대로 자유가 낳는 폐단이 그것으로부터 얻어질 이익보다 거대하다면 자유를 박탈해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닐까? 혹은 자유가 낳은 폐단이 너무 극심하여 소설 속의 세계처럼 우리 스스로가 스스로의 자유를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싶어하는' 상황이 언젠가 오게 되지는 않을까? 



   우리는 지금 자유롭게 각자의 신념을 추구하며 살아가지만, 언젠가 그것을 포기하고 어떤 단일한, 보다 우월하다고 여겨지는 신념체계에 우리의 자유를 '자발적으로' 양도하는 사회가 도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그러한 '자발적 죄수' 의 삶에 더 큰 만족감과 안녕감을 느끼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완벽한 만족감과 안녕감은 개인적 신념이라는 것을 무색하고 의미없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모두가 행복한 완벽한 낙원에 나타난 예수를 상상해 보라. 그가 환영받을 수 있겠는가? 그는 소설 속 야만인의 끝말처럼 미치광이로 취급받거나, 어릿광대마냥 사람들의 흥을 북돋는 유희 거리로 소비될 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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