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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뭇펭귄 Jul 22. 2021

사이코패스가 무덤덤하게 죽음을 준비하는 법

알베르 카뮈 - 이방인






  이방인이 된 듯한 감각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아마 해외 여행을 가봤던 사람, 그 중에서도 혼자만의 배낭여행을 떠나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감각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수 년전 난생 처음으로 혼자 외국으로 배낭여행을 떠나본 적이 있는데 그 때 마주했던 감각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사람들이 입으로 내뱉는 모든 말들이 의미없는 소음으로 느껴지는 감각, 손에 들린 번역기와 지도 어플에 의존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은 나로 하여금 이방인이 된 듯한 두려움을 불러 일으켰다. 세상에 대한 아무지식 없이 태어난 최초의 인류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세상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져 광활히 펼쳐진 초원을 허망히 쳐다볼 수 밖에 없는 최초의 원시인의 무력감은 먼 훗날 태어난 동양계 호모사피엔스의 유전자에도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러나 다행인 점은, 그 원시인 또한 평생을 이러한 '이방인' 신세를 전전하며 살아가지는 않았을 거란 사실이다. 아마 그 원시인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원시인들을 만나, 공동체의 안위를 위한 일련의 규칙을 제정하고, 그러한 규칙과 합의가 주는 안정감과 예측성에 안주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현대사회의 인간도 다를 바가 없다. 스스로 택한 배가본드(vagabond)의 인생길 이면 모를까, 대부분의 인간은 본능적으로 가지는 '사회성' 이라는 심리적 특질의 지배 하에 그가 마주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새롭게 만난 사람들과 친분을 쌓으며 생활의 규칙성과 안정성을 영위해 나간다. 타성에 젖은 것이 아닌 현실적인 선택을 했을 뿐이라 자기만족하며, 이만하면 족하다는 만족감,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은 처지라는 연대감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뫼르쇠도 그러한 '타성에 젖은 인간' 의 삶을 살아간다. 일을 하고, 여자친구를 만나고, 다양한 사람들과 곧잘 어울리는 등 감옥에 가기전까지 뫼르쇠의 일상은 소위 '인싸'의 일상과 다를 바가 없다. 만약 내가 뫼르쇠의 지인 이었다면, 그는 별 의욕이 없고 나태한 사람 같지만 겉과 속이 똑같은 담백한 성격이라고 평가했을 것이다 (실제로 소설 속에서 그의 지인들이 그를 두고 '남자답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실제로 이런 성격은 남자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있는 성격이기도 하며, 태평함이 주는 관능적 매력에 호감을 표하는 여성들도 있다. 소설에 등장한 1인칭 시점의 심리적 묘사를 걷어내고 오로지 그의 겉으로만 보여지는 모습으로 평가한다면 그는 꽤 호감이 가는 인간 유형이라는 것이다. 그는 세상적 관점에서는 이방인이 아닌 '내부인'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소설의 제목이 '이방인' 인 탓은, 뫼르쇠가 가진 세계관과 인생관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그것들과 매우 다르다는 데 기인한다. 뫼르쇠는 외부에서 봤을 때는 내부인 일지 몰라도, 심리적으로는 철저히 이방인에 해당한다. 그는 특정한 야망도 없고, 자기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지도 비관하지도 않으며, '아무렴 어떤가' 라는 식의 초탈한 인생관을 가지고 있다. 다만 이것이 불교의 인생관과 맞닿아 있지는 않은 것이, 그 스스로 매우 욕구에 충실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는 성욕에 충실하고, 수면욕에 충실하며, 햇빛의 강렬함에 도취되어 스스로를 잃어버리기도 하는 등 매우 감각중심적인 사람이다. 뫼르쇠는 이러한 충동적 감각들을 의식적으로 회피하려 하지 않고, 회피하지 못한 스스로를 정죄하지도 않으며, 순간적으로 고양되고 추락하는 감각의 파동에 스스로를 내맡긴 채 살아간다. 



  그러나 살인 사건을 계기로 뫼르쇠의 이러한 내밀하고 감각적인 심리는 대중들에게 낱낱히 까발려지게 된다. 뫼르쇠의 살인은 초기에는 정당방위에 의한 것으로 판명되었으나 그의 심리적 추악함을 근거로 든 검사의 열변에 의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사이코패스에 의한 반사회적 범죄로 판명되어 진다. 또한 대중들은 피곤해서 어머니의 장례식 때 울지 않았던, 햇빛이 너무 강렬해 총을 쏠 수 밖에 없었던 뫼르쇠의 심리를 이해하지 못하며, 그를 철저히 악인으로 규정한다. 법적으로 보았을 때 피고의 성격적 요인을 근거로 들어 형량을 높이 책정하는 것은 부조리하나, 사회의 공동 정서에 반하는 심리적 특질을 지녔다는 이유로 뫼르쇠는 사회 밖으로 영원히 추방당한다. 카뮈는 이러한 심리적 이방인이 사회적 이방인이 되어 버리는 과정을 심리적 내부인의 관점이 아닌 심리적 이방인의 관점에서 묘사한다. 이것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뫼르쇠의 비극이 줄곧 '별 게 아닌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이유라 볼 수 있겠다. 



  가장 극적인 장면은 사형집행 전 뫼르쇠가 사제와 대면하며 감정을 터뜨리는 장면이라 볼 수 있겠다. 왜 그는 줄곧 유지하던 '무덤덤함'의 정서를 깨뜨려 버린 것일까? 죽음이 두려워서? 아니다. 그가 울음을 터뜨린 이유는 단순히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그가 통곡한 이유는 자신을 포함한 모두가 죽음을 선고받았다는 사실, 삶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싶어서였다. 그의 눈물은 자신에게 부조리한 판결을 내린 사람들과, 단두대에서 자신을 조롱할 사람들 모두에 대한 증오심과, 안타까움과, 인간적 동료애가 한 데 응축된 뫼르쇠라는 인간의 실존적 결정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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