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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츠네 May 04. 2023

강백호의 천재라는 마음

"나는 천재니까!"

만화 슬램덩크의 주인공 강백호가 늘 내뱉곤 하는 대사다. 고교 입학 후에야 농구를 처음 시작한 풋내기 강백호지만 그는 주눅 들기는커녕 자신을 천재라 지칭하며 고개를 빳빳이 세우기까지 한다. 진짜 농구 천재 서태웅을 동등한 라이벌이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스스로를 믿는다는 건 앞으로 나아가는 강력한 동력이 된다. 누군가에게 기고만장하게 보일 수 있어도, 풀 죽어있는 것보단 훨씬 낫다. 인생은 타인의 시야 속 여정이 아니라 내 시야로 헤쳐가는 것이니까. 백호에게는 원석 같은 재능이 있었고 거기에 더해 자신감도 있었다. 실력과 확신을 둘 다 갖기란 매우 어려워서 실제로 백호는 천재임이 분명하다. 천재가 맞다. 하지만 실력이 없다고 해서 스스로를 믿는 힘마저 없다면 이 험한 세상을 헤쳐나가기란 매우 어렵지 않을까.


신감 없는 삶이란 노 없이 표류하는 나룻배와 같다. 그저 일렁이는 파도에 휩쓸리고야 마는. 30대의 나는 어떤가. 다행히 두 손으로 노를 쥐며 두 눈으로 가야 할 곳을 두리번거리며 나아가려고 애쓰고 있구나. 한때는 노를 쥐기가 두려워 납작 엎드린 채 파도가 일러주는 대로 몸을 맡긴 때도 있었다. 고등학생 무렵, 키는 더 이상 쑥쑥 크지 않고 얼굴에 여드름은 생겨나면서 자존감은 떨어지는데, 학교는 수능이라는 이유로 밤 10시까지 모두를 가둬놓았다. 혼자서 마음 다잡을 시간도 없이, 수능과 관련된 활자만 읽고 또 읽고, 교과서 속 이야기를 마음의 양식보단 수능의 양식을 위해 읽어야 했고, 나는 서서히 병들어 가고 있었다. 내가 싫어져 거울을 보기가 무서웠고 단체사진을 찍을 땐 슬그머니 빠진 적도 많았다. 성적은 안 나왔고, 나에 대한 확신도 없었으므로 고교 생활은 지금 돌이켜봐도 시리고 답답한 그런 시간이었다.


나는 나를 좋아했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천국의 계단에 나온 권상우 소라게 모자를 쓰며 자아도취를 하기도, 국회의원이라는 꿈을 친척들 앞에 내어놓기도 , 스스로를 궁금해했고 뭐든 할 수 있을 거라 재능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 자신감으로 하루는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처럼 스스로 고취되어 본 적도 있다. 중학교 때까지는 성적도 쑥쑥 올랐고, 담임 선생님께서 그렇게 성적이 많이 오른 비결이 뭐냐고 따로 물어보셨을 정도였다. 따로 명문학원을 다니지도, 고급 과외를 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구룡포 촌 동네에서 자기에게 조금 고양된 순수한 청년이었을 뿐이다.


암흑기 같았던 고교 생활을 보내고서 재고의 여지없이 재수를 선택했다. 당시 수능 후에 원서조차 넣지 않 포항을 떠나 부산에서 재수 공부를 시작했다. 전포동 달동네에 보증금이 100만 원 남짓한 허름한 원룸, 그곳이 나의 첫 자취방이었다. 비록 열악했지만 해방감을 느꼈다. 동급생 무리 속 똑같은 교복과 비슷한 짧은 머리에서 해방되니 내 개성이 슬금슬금 눈에 들어왔다. 대학교를 가면 이 개성을 꽃피워야지. 거울 속 나를 들여다보는 게 익숙해졌고, 1년의 재수생활에 나름 부응한 성적으로 부산의 국립대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패션과 머리스타일에 관심을 가지며 다시금 나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키도 작고 잘생긴 얼굴도 아니지만 나에게서 고유한 '나'를 봤다. 이 매력을 가꿔나가면 타인이 나를 대체할 수 없는 '나'가 되겠지. 외모뿐만 아니라 수험서 속 활자 대신 문학 속 활자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자외선을 쬐듯 세상의 팔색조를 흡수하고 싶었다.


'잠깐만 나 꽤 멋있는 구석이 있구나.'


그런 시간들이 퇴적되어 어느덧 30대가 되었다. 지난날을 돌아보니 '나'로서 꽤 많은 걸 해왔고 바뀌어 왔구나. 뜨겁기도 미지근하기도 한 연애도 했다. 공무원 시험에도 합격했으며 차곡차곡 진급도 하고 있다. 소형 suv를 몰면서 차에서 내릴 때 혼자만의 하차감도 느낀다. 볼에 살이 실하게 올라온 고등학생 때의 사진을 보고 나서 거울 속 현재의 내 모습이 미남으로 느껴진다. 날렵한 턱선에 반영구로 짙어진 눈썹 그리고 정돈된 가르마. 이제는 자뻑들이 자연스레 배어있다. 이 자뻑은 자기 객화가 아닌 지극한 자기 주관화의 산출물이다. 사실 남들에 비해 가진 것보다 갖지 못한 것이 여전히 많을 거라 생각한다. 괜찮다, 쫄아있는 나보다 자신감 있는 내가 좋다. 백호처럼 실력과 자신감 둘 다를 가지진 못할지라도 설사 재능은 타고난다 할지라도, 적어도 자신감 하나만큼은 우리의 의지로 움켜쥘 수 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했지만, 그건 익은 자의 여유고 익지도 않았으면서 고개부터 숙이지 말자. 강백호의 마음으로 살아야겠다.

"나는 천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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