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과 조각품이 우리에게 알려준 것들
흔히 암흑기라고 생각되는 중세이지만 그 시절 존재했던 수많은 아름다운 예술을 보는 것만으로도 결코 그 시대가 한 문화의 부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음을 느낍니다.
중세에 대해 저에게 해설을 붙이라고 한다면, 교회를 따라 전개되던 공식적이고 근엄한 문화의 한 축과 더불어 상대적으로 덜 조명되지만 일반 서민들의 삶 속에서 발달한 세속 문화의 축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해 가는, 문화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시기라고 하고 싶네요.
건축과 회화, 조각이 한 몸으로 꽃피었던 총체적 예술의 시기. 중세.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의 질문을 던져 봅니다. 대성당을 짓던 목공은 자기 자신을 예술가라고 생각했을까요?
이번 편은 예술의 자기 인식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중세는 삶의 수많은 부분들이 신앙으로 번역될 수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경제, 노동, 건강, 탄생, 죽음…… 이 모든 것이 하느님에 대한 설명으로 해결되었으니 사람들이 교회에 그토록 의지했던 것도 무리가 아니지요.
사람들의 삶은 지금보다 단순했습니다. 수확을 거두는 기쁨, 이웃과의 교류, 일몰에 물드는 들판의 황금빛. 모든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었습니다. 중세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콘서트장에 모이는 것처럼 선교사의 연설(물론 기독교 신앙에 관한 강론이었습니다)을 듣기 위해 광장에 몰려나왔고, 교회의 종소리에 가슴에서부터 울리는 감동을 느꼈습니다.
중세에 미적 기쁨은 신앙의 성스러운 고양과 잘 구분되지 않았습니다. 기가 막힌 고딕 성당의 조각을 새기던 조각가는 아마도 그 속에서 신앙의 충만한 즐거움을 맛보지 않았을까요? 이것이 바로 그 시대에 온갖 화려한, 현재 시선으로 이름붙인다면 '기독교 테마의 예술' 이 등장한 이유였지요.
이런, 예술이 아닌 신앙으로서의 인식은 창작 분야에 전반적이었습니다. 그레고리오 성가로 대표되는 초기 교회 음악은 단선율이었는데, 처음 다성 음악이 도입되었을 때 교회는 미사에서 풍부한 화성을 사용하는 일을 금지하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음악이란 신에게로 다가가기 위한 도구이자 통로였기 때문에, 음악 감상 자체에서 오는 쾌락이 너무 커지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지요.
(몇백 년 후에도 바흐가 교회에서 '오르간을 너무 현란하게 연주하여 신도들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한다' 는 이유로 비난받았던 것을 보면, 예술에게 예술의 이름을 붙여 주지 않는 교회의 근엄한 태도는 꽤 오랫동안 이어져 왔던 모양입니다.)
후기 고딕 회화 양식이 한껏 반영되어 꾸며진 <베리 공의 매우 화려한 기도서> 는 대형 삽화 66개와 소형 삽화 65개를 포함하여 값비싼 안료와 금박 등을 사용해 아름다운 세밀화와 캘리그라피로 가득한 기도 교본입니다.
베리 공의 의뢰로 처음 만들어지고 이후로 수많은 화가들의 손을 거친 이 기도서는 그야말로 화려할 뿐만 아니라 그 시대 계절 정서와 사람들의 생활을 자세히 표현하고 있어서 20세기에 이르러서는 중세 유럽 사회를 묘사하는 삽화로도 자주 인용되곤 합니다.
지금 시선으로 볼 때 이 기도서는 예술적 작품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하지만 당시에는 어땠을까요? 대단히 화려하게 꾸며진, 매일 정해진 시각에 기도를 올리기 위해 펼쳐 보는 교본이었지요. 그림을 그리던 화가들은 구석구석 실감나는 표정을 그려 넣으면서도 자신이 예술을 하는지, 일을 하는지, 신앙 생활을 하는지 확실히 구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편을 쓰기 위해 <작문삼일> 다른 필진 두 분께 예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인간이 기호를 만족하기 위하여 심미적인 목적으로 하는 활동', '제작자의 특정한 의지의 표상이 수용자에 의해 예술로 인지되는 순간' 과 같은 답변을 주셨는데요, 저 또한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요점은, 창작자이든 수용자이든 예술 행위 또는 예술품을 사이에 두고 그것이 예술이라고 인식한 채 대해야만 성립되는 지점이 있다는 것이겠지요.
중세 사람들은 분명 자신이 맡은 영역에서 예술적인 영감과 상상력, 창의력을 한껏 발휘했습니다. 중세의 예술은, 그리하여 지금의 눈으로 본다면 필시 찬란하도록 있었을 것입니다만 그 시대의 장본인들에게는 '기술로서 구현되는 예술' 보다는 '영감을 다한 신에게의 봉헌' 이라는 말이 더 가깝게 느껴지지 않았을까요?
무언가를 아는 일은 그것을 알고 보느냐 모르고 보느냐에 많이 달려 있습니다. 과일이라는 개념을 알고 사과를 볼 때와 그것이 음식이라는 단서를 가지지 않은 채 보기. 예술의 개념을 모른 채로 작품을 만들기.
르네상스를 거쳐 나타난 현대의 바우하우스는 중세의 그때처럼 건축가와 조각가, 화가가 모두 공예(art)라는 한 개념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만, 그렇기 때문에 실은 르네상스에 꽃폈던 예술가 인식도 함께 품고 있다고 해야겠습니다.
같은 작업을 한다고 해도 '마음을 다해 성당을 짓는다' 라고만 여기는 상태와 '나는 건축가이자 조각가, 화가의 일을 하는 한 명의 예술가로서 일한다' 라고 생각하며 임하는 상태는 다르니 말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건축가', '조각가', '화가' 라는 개인이 한 번 찾아내어져 명명된 르네상스를 거쳤기에 도달할 수 있는, 새로운 현대의 종합적 인물상입니다.
이름을 알고 불러야만 의미가 되는 꽃처럼, 안다는 것만으로 세상은 이렇게 다르고 표면에 드러나지 않아도 과거는 어떤 형태로든 현재 속에 존재합니다. 인류사의 지나온 부분들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모두 현재에 승계되고 있습니다.
지나간 시대에서 알아내어 이름 붙여 건네어 준 꽃다발들로, 우리는 지금 무엇을 만들고 또 미래로 이어보낼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