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을 나서도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왜 다들 이 영화가 그렇게 좋다고 하는거지?
인스타그램에서 올라오는 다양한 지인들의 기대평에 이 작품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목서부터 범상찮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이더라구요. 그리고 개봉날 감상하고 완전히 이 작품에만 매몰 되어버린 지난 한 주입니다. 다른 드라마, 영화를 못 보고 있습니다. 이 글만 붙들고 있었습니다.
이 글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Portrait de la jeune fille en feu) 을 보고 나섰지만, 저처럼 궁금한 것들이 많았을 여러분들을 위한 자료 아카이빙입니다.
시놉시스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 마리안느(노에미 멜랑)는 원치 않는 결혼을 앞둔 귀족 아가씨 엘로이즈(아델 에넬)의 결혼 초상화 의뢰를 받는다. 엘로이즈 모르게 그림을 완성해야 하는 마리안느는 비밀스럽게 그녀를 관찰하며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의 기류에 휩싸이게 된다.
새해가 되자마자 아트버스터라는 수식어가 붙은 영화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이 조금 늦게 국내 개봉을 하였다. 아트버스터(ArtBuster) 는 예술작품과 블록버스터가 섞인 파생어다. 처음에는 이 단어가 생경했으나 예술과 상업의 거리가 가까워질 수 있다는 일은 반가운 일이다.
작년 봄, 칸에서부터 시작된 이 영화에 대한 영화팬들의 큰 기대에 힘입어 1월 16일 국내 개봉 이후 매일 약 1만명씩 돌파하고 있다. '천만관객'에 익숙한 대중에게 1만명은 극적으로 적게 느껴질 수 있다. 엄복동의 최고 아웃풋인 1UBD = 17만명을 기준으로 봤을 때에도 개봉주차에 0.2UBD이니, 절대치로는 높은 수치가 아니다.
하지만 아트영화 혹은 독립영화들은 멀티플렉스 극장 세상에서는 '스크린 배정 더럽게 힘듬'으로 분류되는 비운의 영화들이다. 그 때문에 개봉 주차에도 스크린 비중이 전국 기준 0.6 ~ 1% 인 100개관 밖에 되지 않는다. 그 점을 감안한다면 이 작품은 흥행 성공이라 봐도 무방하다.
아트버스터의 대표작인 <캐롤> (2015/토드 헤인즈) 은 당시 약 200개 스크린을 배정받고 일 평균 1.8만명을 모객했다. 2년 전 극장에 N회차 돌풍을 분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2017/루카 구아다니노) 역시 192개 스크린으로 개봉주차에 일평균 1.5만명을 모객했다.
이런 아트버스터 흥행을 이끄는 이유는 간단하다. 영화가 어마무시하게 잘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건 사견이라기보다 어느 정도 기정사실같은 기분이 드는건, 저명한 영화평론가들의 평들이 뒷받침해준다.
1. RottenTomato Tomatometer: 97%, Audience Score: 89%
2. 왓챠 평균 4.4/5.0
3. 평론
Anthony Lane: It couldn't be fresher if it were mixed on a palette in front of us, and the intensity with which, in the second half, the two women look themselves into love, as it were, is fleshly, funny, and sublimely untheoretical.
김혜리: 착취하지 않는 응시로 고양된 예술 (5.0/5.0)
이동진: 서로를 응시하는 시선으로 선연하게 타오르는, 영화 자체가 아름다운 불꽃같다 (5.0/5.0)
- 이 영화는 2018년 10월에 촬영을 착수하여 38일만에 촬영을 마쳤다. 타오르는 불꽃같이 정말 엄청난 속도다. 촬영 장소 역시 극 속에서 등장하는 프랑스의 어느 작은 북부섬에서 촬영하였다.
- 엘로이즈와 마리안느를 연기한 두 배우는 실제 동갑이며 키도 동일하다. 동등한 연인 관계와 대칭을 시청각적으로 나타내는 데 집중한 작품이라 그런지 대칭성에 더욱 부합한다.
- 실제 감독인 셀린 시아마와 엘로이즈을 연기한 아델 한넬은 옛 연인 사이였다. 그들은 이번이 두 번째 작업을 진행하였다고 한다.
- 영화에서 음악은 딱 두 번 등장한다. 감독 셀린 시아마는 음악 연출과 관련하여, 관객이 리듬에 빠지길 원하고, 음악이 등장할 때 이의 중요함을 단번에 느끼길 원했다고 한다. 하여, 음악이 등장하는 시퀀스서 배우들의 몸짓과 카메라의 움직임에 맞게 음악을 넣었다고 한다. 셀린 시아마의 리듬에 대한 집요함은 두 배우들의 걸음의 보폭, 속도, 대사를 한 후 숨을 들이 키는 순서마저도 코칭을 직접 하게끔 진했다고 한다.
영화 속의 두 개의 음악들
<Fugu non possum> 라는 라틴어 노래로, 한국어로 <우리/그들은 벗어날 수 없어> 정도로 해석된다. 이 음악은 섬 안의 축제서 여성들이 모닥불 앞에 모여 리듬에 맞춰 화음을 맞추면서 등장한다.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관계가 전환되던 지점이었다. 다소 운명론적인 이 노래 음악은 이후 결말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비발디의 <사계> 여름 3악장. 하프시코드, 바이올린, 첼로 세 악기의 삼중주가 빛나는 2분 30초 내외에 연주가 끝나는 아주 빠른 곡. 바이올린이 지르는 비명, 하프시코드의어딘가 불협화음같은 긴장감, 첼로가 완성하는 음악적 깊이가 더해진 전무후무한 대중적인 클래식. 이 노래가 영화의 마지막에 엘로이즈를 클로즈업하며 들리는 장면은 영화관에서 꼭 봐야하는 포인트다.
<사계> 여름 3악장: https://www.youtube.com/watch?v=-SUvnM3nqfU
- 개봉 전 기자 초청 프리미어서 어느 기자가 '마리안느를 연기한 배우 노미에 멀랭이 레즈비언이라 혹 그녀를 캐스팅하였는가' 라는 무례한 질문에 감독 셀린은 '그것이 무슨 질문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라고 응수했다.
- 영화 중에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비극 신화가 여러번 등장한다. 오르페우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시인이자 악사다. 죽은 에우리디케를 지옥에서 꺼내오는 길에 다 나서기 전에 뒤 돌아 그녀와 영원한 이별을 다시 한 그리스 신화의 대표 비극서사. 팬들은 이 영화에서 은유적으로 사용된 신화 중 어느 쪽이 마리안느이고 엘로이즈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예술적 재능으로 엘로이즈를 구하는 마리안느 같아보였지만 영화의 마지막 대사는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쳐다보며 "She didn't see me." 로 끝난다.
- 셀린 시아마는 실제로 영화를 찍으면서 "우리가 세상을 구하고 있는 것 같아." 라는 찬사를 했다고 한다. 특히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향해 울면서 "너의 어머니가 돌아오고 있어"라고 하는 키스를 나누는 씬을 찍었을 때 컷을 외치고 그 말을 했다고 한다.
평등한 관계를 기저로 한 사랑과 예술 영화. 초상화라는 시각 예술에서 출발하였으나 음악과 문학까지 매끄럽게 연결한다. 그 연결에는 흠결이 없는지 아니면 어차피 일생에선 마주할 수 없는 완벽함이라 그다지 흠결이 신경쓰이지 않는 것인지 헷갈린다. 그래서 보고 나면 비발디의 사계 음악처럼 불안한 소용돌이가 마음에서 빗발친다. 나는 평생의 예술가의 삶을 동경하는 사람으로, 121분안에 예술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전에 보지 못한 방법으로 온전히 경험 해 볼 기회를 드디어 얻었음에 감사한다. 셀린 시아마는 작은 내 세계를 구했다.
인스타그램 계정 @averyslibrary 에는 월간 여성서사 티켓 나눔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2020년 1월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이었으며, 다음 영화로 기대하는 작품들을 알려주세요.
2020-01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2019-12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2019-11 윤희에게
2019-10 82년생 김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