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는 글을 쓰기 전부터 작가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예전에 언급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고등학교 3학년 때 인스타그램에서 일상툰을 연재했던 것이 그 일이다. 연재 주기도 없던 데다 아쉬움이 남는 짧은 연재 기간이었지만, 덕분에 '작가님'이라는 벅찬 이름으로 불릴 수 있었다.
남들은 잠도 안 자고 공부만 한다는 고3. 하지만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법이었다. 당시의 나는 목표도 없이 꾸역꾸역 공부하는 스스로에게 지침과 동시에 환멸을 느꼈고,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반항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뭐든 잘 기억하지 못하는 나지만 그때만큼은 확실히 기억이 난다. 저녁 8시가 훌쩍 넘어 어두컴컴하던 창밖과 마찬가지로 어둡고 조용했던 독서실 칸막이 속. 귓등으로 흘리고 있던 인강을 끄고 그대로 태블릿을 돌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던 때의 희열. 칸을 나누는 법도, 레이어를 나눠 컷을 만드는 것도 몰라 정말이지 엉망진창으로 그려 올렸던 프롤로그는 내 마지막 고등학교 1년의 가장 큰 일탈의 시작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사실 이전에도 인스타그램에 그림을 올리는 일은 잦았다. 수채화, 스케치, 아크릴화 등 그리는 족족 사진을 찍어 올렸었다. 그런데 만화는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그리면서도 웃음이 났다. 내가 다시 만화를 그려서 남한테 보여주다니, 정말 얼마만의 일인지. 반갑기도 하고 새삼스럽기도 해서 첫 화를 그리는 내내 조용히 미소만 지었던 것 같다. 만화가를 꿈꾸던 때가 있었다. 그것도 꽤나 오랫동안 말이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때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순간부터 나는 이미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어렸을 때부터 나는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다. 왜 그림을 그리냐는 질문에 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그림이 나의 운명적인 업이라고 믿었다. 펜으로 무언가를 그릴 때만큼 즐겁고, 내가 능력이 있다 느껴지는 순간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계속 그렸다. 조례 시간이나 쉬는 시간마다 공책에 그림을 끄적였고, 방과 후에는 같이 그림을 그리는 친구들과 모여 각자 그린 그림을 공유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 계기가 무엇인지는 마찬가지로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만화를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기는 내가 이야기로 여러 가지 공상을 하던 시기와 맞물려 돌아갔다. 신비한 능력을 가진 요정들의 모험 이야기,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초능력자들의 이야기. 지금 생각하면 참 허술하고 유치한 이야기들이지만 그때는 그만큼 재밌는 게 없었다. 어찌어찌 몇 컷을 그리고 다른 친구들과 모여 서로의 만화를 돌려봤던 때,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의 풋풋한 설렘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리고 초등학교의 졸업과 동시에, 나는 만화와 작별했다. 거기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어려워진 수업과 늘어난 공부량, 바빠진 일과. 그리고 그림에 대한 자신감 저하였다. 뻔한 이야기지만, 세상은 넓고 인재는 많았다. 6년간 한 학교에서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다 전혀 다른 곳에서 온 사람들을 마주하자 그 말이 뇌리에 박히듯 다가왔다. 그림을 보여줄 때의 불안감과 다른 사람의 그림을 볼 때의 박탈감에 점철된 나는 점차 학교에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못하는 것도 잘하려 애쓰던 때에 잘한다고 생각한 것 마저 빼앗긴 기분이었다. 그렇게 내 그림들은 내 방 책장 속, 한 구석의 스케치북 위에만 존재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기에 가장 많은 그림을 그렸다. 사실 돌아보면 가장 창의력이 돋보이는 그림들이 많았던 시기였다. 그때의 나에게 그렇게 가혹하지 않아도 됐었다고, 언제나 그렇듯 다 지난 지금에야 후회를 한다.
그리고 고등학교. 예나 지금이나 내가 공인하는 내 근자감의 황금기. 온갖 것에 손길을 뻗는 와중에 내가 그림을 놓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2019년 2월 13일, 인스타그램에 한 장의 그림을 올렸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생각에 잠겼다.'라는 짧은 문구가 적힌 색연필 그림이었다. 글을 쓰기 위해 다시 그림을 확인하는 지금, 정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지경의 완성도지만 차마 지울 순 없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 그림이 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로부터 약 1년 뒤인 2020년 3월 25일. 내 인생 첫 연재가 시작되었다. 구구 절절하게 사연을 풀어놓으니 꽤나 장황하게 느껴지지만 사실 어찌 보면 단순하다. 항상 그림을 그리던 내가, 장장 5년 만에 다시 이야기를 그리기 시작했다는 스토리다. 다만 이 이야기의 결말은 그리 유쾌하지 않다. 사실은 결말도 아직 나지 않았다. 고3의 일상을 그린답시고 공부 시간, 잘 시간을 쪼개가며 이어갔던 연재는 18화 만에 막을 내렸다. 입시에 대한 스트레스와 일상의 피로, 극한의 무력감 사이에서 도저히 펜을 들 수 없었다. 결국 다시 돌아오겠다는 무책임한 말과 함께 휴재를 선언했고 그 공백을 이어온 지 3개월 정도가 되었다. 이쯤 되면 눈치챘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공백기 동안 시작한 것이 지금의 연재이다.
돌아가야지, 다시 만화를 연재해야지. 항상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이지만 막상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고 있다. 지금의 내게 여유가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섣불리 시작해서 또 멈춰버리는 게 아닐까, 또 무책임하게 떠나버리면 그땐 돌아갈 기회가 남아있을까. 하루에도 몇 번씩 떠오르는 마음은 주로 한숨으로 끝이 난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고 씁쓸한 마음을 외면한다.
가장 좋아했지만 잘 돌보지 못해 가장 먼저 멈춰버린 나의 아픈 손가락. 언젠가 올렸던 한 줄의 공지처럼, 꼭 더 좋은 그림과 함께 그곳을 찾아가고 싶다.